"처음 책이 왔을 때 벅차서 못 만지겠는 거예요.(웃음)"
5년 동안 쓴 시가 한 권의 책으로 새롭게 태어났을 때, 시인은 가슴이 벅찼다. 시를 묶어 시집을 출간하면서 느낀 마음을 멀리 떨어져 지내던 애인과의 재회에 비유했다.
"유학 간 애인과 이메일로만 주고받다가 만나는 상황처럼 설레죠."
2012년 첫 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문학동네)에 이은 두 번째 시집이지만 시인은 처음처럼 기쁘다. <사과시럽눈동자>(천년의시작)이 지난 2월 출간되었다.
"선명한 이미지를 시집 제목으로 하고 싶었어요. 전체 시의 이미지와 비슷한 게 아닌가 해요. 글썽글썽한 이미지?"
잊고 있었던 꿈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시를 이번 시집에 담았다.
"꿈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아는 사람 같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 같기도 해요. 그런데 그 사람과 꿈에서 무엇을 했단 말이죠. 그런 아련한 기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면 좋겠다 했어요. 한 번 정도는 겪었던 것 같은 그 느낌을 재현하고 싶었죠."
그는 벌써 세 번째 시집 준비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1~2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꾸준히 메모한다.
"강박증인데요. 작가는 강박증이 조금씩 있다고 해요."
이번 시집을 '어젯밤, 서커스 마차'라고 말했다.
"몽환적이기도 하면서 지나간 이미지를 넣고 싶었어요."
지난 5월 16일,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시인을 만났다.
드라마 속 시집으로 화제
시인은 소설가가 꿈이었지만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시의 재미에 빠졌다.
"소설보다 시가 훨씬 재미있고, 교수님이 시를 너무 잘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시가 더 끌렸어요."
2001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한 그는 첫 포부로 '내 삶의 목표 1번은 무조건 시'라고 썼다. 그리고 2012년 첫 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을 발표했다. 첫 페이지에 썼다. '고맙다 고맙다 나를 허락해줘서, 고맙다 고맙다 당신의 발치에서 울게 해줘서,' 이 시집은 2013년 방영된 SBS드라마 <상속자들>에서 주인공 김탄(이민호)의 책으로 나와 화제가 되었다. 지인들에게 이 소식을 듣고 그는 당황했다고 했다. 드라마에 시집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미리 알고 있지 않은 터였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빗발치더라고요. 시집이 텔레비전에 나왔다고요. 블로그 방문자 수도 늘고요. 책도 갑자기 2~3쇄 찍고 그랬거든요."
인기드라마에 시집이 등장하는 것은 시가 일상과 더 가까워지는 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소품처럼 사용되는 것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조금 더 작가를 알려줄 수 있게 작품의 구절이라든지 장면과 어울리는 시를 낭송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저는 제목과 책등만 나와서 아쉬운 게 있어요."
드라마 팬심으로 산 독자에게도 미안함이 있다.
"제 시는 로맨스와 전혀 상관이 없는 책이라서 그분들과 안 맞을 수도 있죠. 미안한 느낌? 제목과는 맞을지 모르지만 시와 드라마의 이미지가 안 맞을 텐데 그게 좀 아쉽죠."
그는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는 사이, 그의 첫 꿈이었던 소설도 썼다. 로맨스 소설 <낙하산 미스 쏭>, <모모네 서예원>, <여자가 돼줄래>, <꽃도령 유랑단>, <천년도서관> 5편을 썼다.
"한 번 정도는 써보고 싶더라고요. 아무나 쓰는 게 아니더라고요.(웃음)"
요리 이미지에서 영감 얻어
이번 시집은 첫 시집 이후 5년간 쓴 시를 묶었다.
"사람이 늙는 것처럼 시도 조금씩 변화하거든요. 시기별로 묶으려고 애를 써요. 같은 시기에 써서 분위기가 비슷한 점이 있어요. 전혀 상이한 시들은 따로 묶어 놓아요. 맨 뒷부분에요."
시집에는 '죽어서야 널/ 죽어서야 날// 우리는 비로소 한 접시야' - 브레인 커리, '물고기는 영혼까지 비리대/ 양상추는?/ 영혼까지 아사삭' - 볼우물, '계란찜 같은 들판을 등지고 누군가 숟가락처럼 걸어오네' - 로드 뷰, '오늘은 비린 회를 먹기에 아주 좋은 날' - K의 방주처럼 시 곳곳에 요리를 연상시키는 시구가 넘친다.
"요리 이미지 생각을 많이 해요. 요리를 만들 때 느낌이나 기분도 좋지만, 요리 자체가 주는 느낌이 있잖아요? 잼처럼 몽골몽골한 느낌이나 이미지를 차용한 거죠.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아요."
시 '벚'과 표제작인 '사과시럽눈동자'를 추천했다.
"'벚'은 노상 횟집 트럭을 보고 번개처럼 쓴 시죠. 시가 길어야지 감동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짧으면서도 할 말을 잘했고 이미지가 선명한 것 같아서 소개하고 싶어요. '사과시럽눈동자'는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이미지와 화법이 가장 가깝지 않나 해요. 저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시라서 저를 알고 싶다면 이 시를 읽으면 좋지 않을까 해요."
목이 잘린 후에도
아주 잠깐 볼 수 있다고 해
광어는 봤을까
동강 난 몸이 명랑하게 팔딱이는 걸
네가 떠난 후에도
내 사랑은 아주 잠깐 팔딱이는 걸
벚 아래 서면
가장 환한 가지를 잘라
목에 꽂고 싶다
말 대신 꽃잎이 날아갔음 해
잘린 너도 아주 잠깐 꽃을 피우겠지
- '벚' 전문
시는 어떻게 시작될까?
"EBS다큐멘터리에서 뼈에 대한 장면들을 보았어요. 성을 건축할 때 재물로 남녀를 묻었다 할 때, 영감이 떠오르면 메모를 해요. 노상에서 회를 치는 모습을 봤어요. 시 '벚'에도 나오지만 생선 대가리를 잘랐는데 대가리가 아직 살아있어요. 위에서는 벚꽃이 떨어지고 있고요. 불쑥불쑥 지나가다 영감이 와요. 달걀을 깨다가 올 때도 있어요. 달걀은 생명인데, 한 번도 엄마라고 하지 못하고 죽잖아요? 그것에 대해서 문득 떠오르더라고요."
자녀가 학교에 갔을 때 시를 쓴다는 그는 수시로 시를 다듬고 고친다.
"20대에는 바로 써 내려갔는데 지금은 영감이 떠오르면 메모를 하고 수시로 들여다봐요. 밥 먹을 때, 설거지할 때 보면서 살을 붙여요. 뺄 부분도 빼면서요. 일주일 동안 만지고 하다가 됐다 할 때 노트북에 옮겨서 전체적으로 완성을 해요. 주로 낮에 쓰고요."
시집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길로는 의식의 흐름을 이야기했다.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꿈을 꿀 때 이성적으로 꾸지 않잖아요?"
시는 미아 같아 애틋해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을 내기까지 수월하지 않았던 시인의 경험을 통해 첫 시집을 준비하는 신인에게도 조언을 전했다.
"좋은 시를 열심히 쓴다고 생각한다는 자부심으로 투고한다면 언제인가는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만이 아니라요. 꿈을 놓치지 않고요."
시와 가까워지고 싶은 독자에게도 덧붙였다.
"시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시는 최초의 노래거든요. 시에 리듬을 붙이면 노래가 되는 거예요. 편하게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낼 수 있으면 시가 아닌가? 투박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시가 있잖아요? 시도 손맛인 것 같아요.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예쁘게 쓰려고 하지 말고 툭툭 뱉는 것처럼 쓰신다면 읽는 사람도 감동 받지 않을까 해요. 시에 대한 거리감을 좁혔으면 해요."
그는 나이가 드러나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제 감수성만 고집하지 않고 독자의 시선에 맞혀가면서, 제 개성도 잃지 않으면서 지금과 같은 시를 쓰고 싶어요."
이 시대에 시란 무엇일까?
"지금 시대에 시를 떠올리면 가장 오래 살아남았지만 가장 연약한 아이라고 생각해요. 태초부터 오래오래 살아남았는데 지금 시가 살아가기 너무 힘든 세상이에요. 책 나오는 것도 너무 힘들고 읽히지도 않고, 읽는 것도 힘들고요. 미아처럼 되지 않았나 애틋한 마음이 있어요. 그래도 쓸 수밖에 없죠."
세 번째 시집에서는 고양이를 많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귀띔했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거든요. 고양이가 너무 좋은 거예요. 시도 고양이 중심으로 쓰고 있어요."
시집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는 시인의 모습에서 시집과 독자를 대하는 참된 마음이 엿보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 <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 6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