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독립투사 이동녕(1869~1940년)을 언급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처우 문제를 거론하는 대목에서다. "우리는 그동안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잘 모시지 못했습니다"라고 한 뒤 "이제 독립유공자의 자녀와 손자녀까지 생활지원금을 드릴 수 있게 되어 무척 다행스럽습니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월 이동녕 선생의 손녀, 82세 이애희 여사를 보훈처장이 직접 찾아뵙고 생활지원금을 전달했습니다."이애희씨는 이동녕의 셋째아들 이의배씨의 막내딸이다. 그동안은 장손이 아니라서 연금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작년에 신설된 '생계곤란 독립유공자 손자녀 생활지원금' 제도에 따라 올해부터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브리핑> 홈페이지에 따르면, 올해 1월 15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이애희 씨를 방문해 생활지원금과 함께 금일봉을 전달했다고 한다.
한국 근현대사 궤적과 일치하는 이동녕의 삶
흥선대원군이 서양열강의 시장개방 요구에 맞서 싸울 때인 1869년, 이동녕은 지금의 충남 천안에서 공직자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렸을 때 유난히 이사를 많이 다녔다. 10세 때 충북 청원으로, 16세 때 서울 종로로, 17세 때 경북 영덕으로, 19세 때 평양으로 이사했다.
이런 생활은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24세 때는 강원 원산으로, 37세 때는 만주 땅으로 망명했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국권을 상실한 1910년에는 41세 나이로 다시 만주로 망명했다. 그 후로도 독립운동을 위한 정처 없는 삶은 끝없이 계속됐다.
이사 경력만큼이나 다양한 게 또 있다. 이동녕은 23세 때인 1892년 과거시험 소과인 진사시험(문장력 테스트)에 급제했다. 이 나이에 진사가 되면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의 경복궁 장악을 계기로 과거시험이 폐지됐다. 그래서 대과에 응시해 고급 관료가 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부터 이동녕은 사회운동 혹은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1896년 독립협회 활동에 가담하면서부터 선비가 아니라 투사의 삶을 살게 됐다. 바로 이 투사 경력이 이사 경력만큼이나 다양했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이동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석·국무령·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며 20여 년간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국무령은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직무유기로 대통령제가 폐지된 뒤의 정부수반 명칭이었다. 이 같은 임시정부 경력 외에도 이동녕은 오랫동안 그리고 다양하게 독립운동 경력을 축적했다.
한국사 시험공부를 하다 보면, 저절로 익숙해지는 단체나 사건명들이 있다. 1896년 이후의 이동녕 행적을 살펴보다 보면, 그런 단체나 사건명과 자주 접하게 된다. 그만큼 이동녕의 행적은 한국 근현대사의 궤적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독립협회 활동에 가담한 뒤에는 만민공동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 때문에 감옥에도 갇혔다. 1903년에는 YMCA 운동에 가담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른바 을사보호조약) 반대운동을 하다가 2개월간 감옥에 갇혔다.
그 뒤 그의 궤적은 신민회·대한매일신보·오산학교·대성학교·상동학교·경학사·신흥무관학교·대한광복군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한국독립당 등을 거친다. 한국사 시험에 잘 나오는 단체들이 그의 행적에 자주 나타난다. 그 정도로 자기 일생을 독립운동에 고스란히 바쳤다.
추념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동녕은 임시정부 주석·국무령·총리 등을 역임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된 뒤에는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적도 있다. 그가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무엇보다 신경을 쓴 것은 독립운동 통합이었다. 분파별로 갈라진 독립운동을 통합하는 데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1940년 쓰촨(사천)성 치장(기강)현에서 급성폐렴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쓰촨성은 중국 서남부 지역으로 2008년 대지진이 났던 곳이다. 일제 패망을 불과 5년 앞둔 때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71세 나이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런 이동녕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기록이 있다.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 <장강일기>이다. 장강은 양자강이다.
정정화(1900~1991년)는 시아버지 김가진 및 남편 김의한과 함께 중국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했다. 임정 밀사 자격으로 여섯 차례나 국내에 밀파돼 운동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했다. 그뿐 아니라 중국에서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했다. 그가 모신 독립운동가 중에서 한 분이 바로 이동녕이다. 정정화는 이렇게 회고했다.
"석오장(이동녕)은 임정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와는 한 가족 같은 사이여서 내가 꼭 아버님처럼 여겼던 분이었고, 상해(상하이)에서 처음 뵈었을 때부터 줄곧 20여 년을 모셨던 분이다."정정화가 회고한 이동녕의 최후는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의 처지만큼이나 서글프고 쓸쓸했다. 정정화는 "1940년 3월, 우리는 훌륭한 영도자 한 분을 잃었다"고 한 뒤 "임정 주석인 석오 이동녕옹이 사천성 기강현에 있는 임정 건물 2층 침소에서 71세의 나이로 별세한 것이다"라면서 이동녕의 마지막 모습을 소개했다.
<장강일기>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주관하는 1940년 3·1절 기념식이 치장현에서 거행됐다. 충칭(중경)에서도 참가하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기념식 이틀 뒤 그들은 충칭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을 배웅하러 버스 정류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동녕이 정정화를 따로 불렀다.
"일행을 버스로 떠나보낸 후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석오장이 나를 불렀다. '오랜만에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지' 하시면서 오늘 저녁 끼니는 걱정 말라는 것이었다."매일 같이 단체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외식하자는 그 말이 반가웠을 수도 있다. 그런 입장에서는, 남이 해주는 음식을 먹게 되는 게 반가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정정화는 이동녕을 염려했다. '나가서 비싼 음식을 드실 것도 아닌데 차라리 내가 해드리는 게 낫지. 요새 드시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 잡숫는 게 변변할라구요?"라면서 "찬거리 사다가 진지해 드릴 테니 집에서 드세요"라고 권했다. 하지만 이동녕은 생각을 꺾지 않았다. 계속해서 외식을 고집했다.
"아니야. 모두들 나온 김에 놀다가 저녁 사먹고 들어가."결국, 임시정부 식구들은 그날 저녁 단체로 식당에 갔다. 다들 국수 한 그릇씩 주문했다. 그것이 이동녕의 마지막 외식이 됐다. 귀가 길에 피로한 기색을 보였던 그는 그날 밤 몸에 한기를 느꼈다. 더운 물로 찜질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밤새 계속 앓았다.
다음 날, 인근에서 유명한 중국인 의사가 방문해 진맥을 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노환이라 가망 없다"는 말만 남기고 의사는 떠났다. 그래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임시정부 식구들과 한국인 의사들이 열심히 치료했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주위 사람들의 노력도 헛되이 선생은 곡기를 끊은 지 열흘 만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노(老) 애국투사의 마지막 가는 길은 쓸쓸하기 한량없었다." 이 날이 1940년 3월 13일이다. 이동녕은 풍토가 안 맞는 이국땅에서 3·1절 기념식을 치르고 나서 3월 3일 손님들을 배웅하러 외출한 데 이어 그날 저녁 생애 최후의 외식까지 했다. 그런 뒤 열흘간 아무것도 들지 못한 상태에서 급성폐렴으로 투병하다가 '임시정부 산하의 정파들을 통합시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해방 68년과 보훈 예산 5조원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뒤이고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안 좋았기 때문에 독립운동 진영이 희망을 품을 만한 때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이동녕은 민족의 미래에 대해 한 가닥이나마 희망을 갖고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동녕도 미처 예측할 수 없었던 게 있다. 민족이 해방된 뒤에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렇게 고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해방된 나라에서는 독립운동가는 물론이고 그 후손들도 당연히 잘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이 고초를 겪으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역사가 그렇게 뒤틀리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추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국가보훈처를 장관급으로 격상시켰고 보훈 예산규모도 사상 최초로 5조원을 넘어섰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한국은 해마다 정부예산으로 400조원 정도를 쓰는 나라다. 올해 정부예산은 429조원이다. 가정에 비유하자면 아주 부유한 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사는 수준에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훈 예산규모 5조원을 조상을 위해 쓰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다.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은 지금의 이 나라를 만든 분들이나 다름없으므로, 가정으로 치면 조상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분들을 위해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생활지원금도 지원하지 못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해방 68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나마 좀더 도리를 갖추게 된 것은 아주 다행스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