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날로 좁아진다고 하는데 세계사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은 듯하다. 수학능력 시험에서도 세계사를 중시하는 학교나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않고 언론에서 쏟아내는 지구촌이니, 글로벌이니 하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휴가철에 공항에 차고 넘치는 인파 가운데 지구의(地球儀) 돌려가며 세계사를 생각해본 사람은 얼마일까?!
명치대학 문학부 사이토 다카시 교수가 펴낸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은 독특한 서책이다.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른 역사적인 사건을 추적하는 것도 아니고, 인류역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도 다루지 않는다. 지은이는 세계사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의 다섯 가지를 지목한다.
서책의 서문은 다섯 가지 요소를 보다 구체화한다. '다섯 가지 힘과 인간의 감정으로 역사를 읽는다.'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과 함께 인간의 감정을 꼽은 것이다. 다섯 가지 힘을 추려내는 능력도 그렇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것에 추가하는 담대함은 놀랍다. 인간의 치밀한 계산이나 이성적인 추론 혹은 기획이 아니라, 감정이라니?!
욕망의 세계사: 커피와 홍차역사를 돌이킬 때 우리는 소수의 지도자나 엘리트 계층의 활동에 주목한다. 그들이 세계사의 주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간과(看過)하면 역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17쪽)
피지배 집단에 속하는 다수의 활동을 배제하면 역사에 담긴 역동성을 포착할 수 없다는 관점에 의지하여 지은이는 상인을 주목한다. 인간에게 고유한 물욕(物慾)과 유행을 자극하고 선도하는 상인이야말로 대중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다카시가 욕망의 항목에서 기술하는 대상은 커피와 홍차, 금과 철, 상표와 도시다.
8세기 이슬람 수피교도가 마시기 시작한 커피는 16세기에 이르러 이집트에 전래된다. 커피는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발칸으로 전해져, 17세기에 유럽 각국으로 전파된다. 1652년 런던에 최초로 등장한 커피하우스는 불과 30년 만에 3천개로 늘어난다. 잠에서 깨어 있는 느낌을 주는 커피는 열성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현대인의 벗이 된다.
후한시대에 차를 마시기 시작한 한인들은 당나라(618-907)에 이르러 서민도 차를 마시게 된다. 차를 교역품목에 인입한 것은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고, 그들이 판매한 것은 완전 발효차인 홍차였다. 18세기 후반 설탕이 대량 생산되어 홍차는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고, 쉬고 싶은 사람을 위한 음료로 자리 잡는다.
모더니즘의 본질: 지중해, 르네상스, 원근법근대를 단순하게 표현하면 유럽과 유럽인종이 세계 전역으로 세력을 확산한 것이다.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이나 '대항해시대'로 언급되는 유럽의 패권확립이 근대다. 유럽이 주도한 근대는 중세 천년의 침묵과 기다림에서 촉발되었다. <수량화혁명>에서 크로스비는 대학, 기계시계, 인쇄술, 복식부기, 아르스 노바 등을 근대의 촉발제로 거명한다. 반면에 사이토는 지중해 문명과 르네상스, 원근법에서 근대의 새벽을 독서한다.
"지중해는 문명의 요람이다. 지중해를 에워싸듯 다양한 문명이 탄생했고, 그 문명들이 서로 충돌하고 발전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가 되어 다른 문명을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유럽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중해 문명의 특징은 가속력에 있으며, 그것은 로마제국의 확장성에서 표출된다. 이런 가속력이 근대문명의 딜레마를 탄생시켰다." (78쪽)
근대를 열어젖힌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14-16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르네상스다.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모델로 하여 신과 교회의 억압을 벗어나려는 전환기의 운동이 르네상스다. "언어의 독점이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진다!"는 푸코의 주장처럼 중세신학의 언어였던 라틴어의 지배가 종교개혁과 더불어 붕괴된다.
2차원 평면에 3차원 세계를 그리는 원근법이 르네상스 회화의 근본이다. 신과 교회, 성직자의 위계적인 시각에서 인간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원근법의 출발이다. 근대에서 가장 중시되는 감각은 시각이며, 그 결정판이 원근법이라고 사이토는 확언한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말하는 '판옵티콘'은 시각우위의 권력관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몬스터 삼형제: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사피엔스>에서 하라리는 유럽 제국주의가 인류에게 남긴 '선물'로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을 언급한다. 과학기술은 유럽제국의 프로젝트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논리다. 1687년 출간된 뉴턴의 <프린키피아>부터 1945년 원자탄에 이르기까지 유럽(미국)을 제외한 어느 지역에서도 위대한 자연과학의 발견이나 기술적인 업적은 전무하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마르크스가 제기한 사회주의는 70년 실험 끝에 막을 내린다. 그런데 10월 사회주의 혁명 이듬해에 막스 베버는 사회주의의 종말을 예언했다.
"관료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공통으로 흐르는 역사의 필연이자 숙명이다. 자본주의도 관료제화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에서는 그것이 더욱 심화하고 치명적이 될 것이다. 개인의 의견개진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국가 예속성이 심화되고 그 결과로 사회주의 붕괴는 필연적이다." (205-211쪽)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이은 20세기 몬스터로 지은이는 무솔리니와 히틀러, 프랑코와 일본의 파시즘을 제시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자에 모두 반대하는 파시즘은 전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파시즘은 1차 대전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나라에서 생겨났고, 2차 대전은 그렇게 발생한 파시즘이 결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일신교 삼형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얼마 전에 트럼프가 텔아비브에 있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규모 봉기를 감행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뿐 아니라, 무슬림과 기독교도의 성지(聖地)이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 어느 나라나 정파가 독점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세계 각국은 자국 (自國) 대사관을 텔아비브에 상주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거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대교가 말하는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기독교, 예수도 모세처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의 하나이며, 무함마드가 최후의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슬람교다. 유대교 경전 토라는 기독교의 구약성서에 해당한다. 코란에는 구약과 신약성서도 포함되어 있다." (240-241쪽)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이삭의 자손이 예수로 연결되고,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일을 조상으로 모시는 종교가 이슬람교다. 사이토는 대부분의 전쟁사가 이들 종교 삼형제의 집안싸움이라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는 인간구원의 원천인 동시에 전쟁의 원천이다. 이쯤에서 유럽의 근대를 선행한 이슬람 세계를 생각해보자.
"근대 이전에는 기독교 세계보다 이슬람 세계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문화를 소유했다. 이런 상황은 그리스 로마가 문명적인 우위를 상실한 이후 유럽의 근대문명 탄생 이전까지 1천년 동안 유지되었다. 유럽의 근대과학은 이슬람 문화의 유입에서 시작됐고, 아라비아 숫자의 대중적인 보급은 피보나치의 <산반서>(1202)가 출간된 후의 일이다." (271-272쪽)
글을 마치면서욕망, 근대, 몬스터, 종교 외에 지은이는 제국의 개념을 동원하여 세계사를 조명한다. 지배자들의 야망에 기초하여 성립된 제국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왕조를 필두로 지난 2500년 동안 연면부절하게 이어져왔다. 우리는 유라시아를 석권한 원나라를 떠올리면서 동시에 16세기 이후 지금까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유럽 제국주의를 기억한다.
사이토 다카시는 연대기적으로 수용돼온 세계사를 나름의 시각으로 단순화하고, 그것에 따라 역사의 본질을 설명한다. 심오함과 난해함, 복잡다단함과 거리를 두고 명쾌하게 역사의 대강(大綱)을 잡아내는 안목이 탁월해 보인다. 시공간을 종횡무진 질주하는 대가의 관점은 아니지만, 세계사에 무딘 독자에게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정형화된 틀로 지식과 정보를 재단하는데 익숙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천편일률적이라는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학문의 생산과 유통을 선도(先導)하는 나라가 아니라, 오랜 세월 소비자 구실에 만족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도 사이토 다카시의 저작은 신선함과 경이로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뜨인돌 출판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