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소설을 세 번 읽었다. 그때마다 소환되는 기억은 다 달랐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어느 날 불쑥 건넨 친구의 말 때문이었다. 친구는 그 소설 속에 어릴 적 자기 모습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서 쫓겨나 눈밭 위에서 팬티 바람으로 떨고 있는 여자 아이가 대문 밖에서 홀로 서 있던 그 장면. 그런 아버지를 위해 밥상을 차렸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소설 속에 적혀 있다고 했다.
자기 글 속에 담고 싶었던 아리고 아픈 기억이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친구는 무엇인가를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뭐든 아끼면 똥 된다는 게 맞는가 보다 했다. 아낄 만큼 아름다운 기억도 아니었는데, 왜 똑바로 마주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지 아쉬워했다.
이 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는 헌 책방에서 이 책을 사고서였다. 다시 읽은 소설 속에선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난했었다. 큰 방 하나에서 일곱 식구가 살았을 때부터 고등학교에 들어가 내 방을 갖게 될 때까지도 아버지의 매서운 손찌검은 계속됐다.
아버지는 홀로 남쪽으로 피난을 왔다. 외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대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피난길을 나섰다. 16살의 소년으로 전쟁터에서 살아 남아 5남매의 가장이 되기까지, 아버지가 겪은 폭력과 고통은 섣불리 짐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화가 나면, 왜 얼굴이 돌변하는지, 어렸을 적 나는 두렵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을 읽었을 땐 신혼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밤 12시에나 귀가하는 남편의 도움 없이 혼자 아이들을 키우면서였다. 내재되었던 나의 폭력성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외동딸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불벼락을 힘없이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나의 내면에서도 폭력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는 것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물을 마시다 흘려도 나의 눈꼬리는 뾰족해졌다. 아이가 실수로 과자 봉지를 엎어도 나의 입꼬리는 삐뚫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을 향해 소리치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됐다. 처음엔 울음으로 대응했던 아이들은 횟수가 반복되자 내 눈치를 살폈다. 그때 아이들의 숨죽임을 보고서야 알았다. 울컥 치솟는 감정의 덩어리에 혼잣말처럼 씨발, 이라는 욕지기가 올라와 종종 당황했던 순간들의 정체를. 나는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알겠냐, 너?"
"어?"
"씨발, 이라고 자꾸 들으면 씨발, 이 된다는 거."
"어."
"씨발, 이라고 자꾸 말해도 씨발 된다, 너."
"왜?"
"말하면서 자기 말 듣게 되잖아, 씨발씨발, 하고"
"오." (35쪽)
폭력의 끝
황정은의 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송곳처럼 예리한 작가의 시선으로 비극적인 정황들을 밀도 있게 그려나간다. 소년 앨리시어는 동생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들이 직면한 폭력적인 상황이 어떻게 대물림 되는지에 대해. 폭력 앞에서 인간은 "어떤 사람이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나쁜 꿈을 꾸었다고 때리고, 바지에 똥을 쌌다고 또 때리는 앨리시어의 엄마는 어린 시절 눈밭 위에 서 있었던 기억을 잊지 못했다. 엄마가 광기를 일으키며 짐승의 상태로 돌변할 때마다 늙은 아버지는 모르는 척 내버려두었다.
"이 나이 되도록 살고 보니 그렇더라. 사람이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네 어미도 그렇고 다 그렇게 귀하고 불쌍한 거지. 세상 나고 자란 목숨 가운데 가치 없는 것은 없는 거다." (52쪽)
낚시터에서 잡은 물고기를 풀어주며 이런 말을 남긴 아버지를 향해 앨리시어는 독설을 내뱉었다. "입을 찢어놓고서 가치 있는 목숨 운운하는" 아버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매일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는 앨리시어에게 아버지의 연설은 귀에 잘 박히지 않았다. 가치 있는 목숨들인데, 누구는 때리고, 누구는 구경하고, 누구는 상처만 입는다.
엄마가 들지 못하는 무거운 솥을 들만큼 힘이 세진 앨리시어는 "한 번에 그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엄마가 눈치 채지 못하게 힘을 키워나가 단번에 제압해 영원히 승리하는 것. 이제 소년에게 세상은 표적의 대상이다. 앨리시어는 매 맞는 친구 집 유리창을 향해 돌팔매질을 했다. 곧 역전의 순간이 올 것이다.
"앨리시어가 맛을 보여주겠다.
이길 것이다.
끝날 때까지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125쪽)
폭력의 끝은 좀처럼 쉽게 막을 내릴 줄 몰랐다. 세상을 향해 맞서보겠다는 앨리시어의 대결의지를 그려낸 이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한 편으론 통쾌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잔뜩 겁에 질렸던 나는 결혼 전까지 아버지에 대해서 그 어떤 비난의 말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억울한 것과 맞서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력하게 길들여진다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다. 약자를 향해 달려드는 폭력의 속성은 나의 내면에서 발화되어 내 아이들 앞에 나타났다.
앨리시어가 보여주려는 맛은 폭력 앞에 쉽게 무너지지 않겠다는 처절한 의지였다. 앨리시어는 대물림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앨리스처럼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갈 수만 있다면, 토끼가 안내해주는 굴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발이 땅에 닿을 것 같지 않은 불안감을 떨쳐내고, 굴 속으로 달려 가볼 것이다.
소설 속 사이마다 반복되는 문장 한 구절.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지금 앨리시어는 사거리 모퉁이까지 와 있다. 감색 치마 정장에 스타킹을 신고서 열십자 횡단보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여장 부랑자로, 늙어 보이지만 언제나 꿈을 꾸고 있어, 늙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토끼가 안내해주는 굴속까지 달려들 것인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사거리 한복판까지 뛰어볼 텐가. 아니면 계속 주저앉아 있을 것인가. 제자리걸음만 할 텐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나는 '어떤 상태'에 머물지 않고 '어떤 사람'으로 회복하고 싶었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과 직면하기 두려워 나는 어린아이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십여 년 전 경기도에서 주관했던 무료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사람들 앞에 내 얘기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내 불안한 내면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자각했다. 부당함과 부조리함의 궁극적인 실체가 내 가족일 수도 있음을 이해했다. 같은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다른 이름이 바로 가족이었다. 그래서 상처는 이어지고 반복되어 대물림이 된다. 결코 그것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대물림의 저주였다.
이 소설의 제목인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여장 부랑자로 거리를 배회하는 앨리시어인지, 자신의 상처에만 갇혀있는 앨리시어의 어머니인지, 혹은 가정폭력의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을 방관했던 앨리시어의 아버지와 이웃들인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모든 것이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기록하지 않을 그대인지, 아니면 "알기 때문에 모르고 싶어하고 모르고 싶기 때문에 결국은 모"르게 되는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두컴컴한 내면의 동굴 속으로 뛰어들 각오를 되새겨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상처에만 머물지 않고 어떤 사람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 모두가 내 이웃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제 3의 눈을 키워야 한다는 것. 잊지 않고 기록하여 망각의 편리함에 길들여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