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투쟁을 생각하게 하는 대구광역시 중구 동덕로 33 일원은 현재 청운맨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인 경북고등학교가 수성구 황금동으로 이전하면서 아파트 단지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현지에는 경북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라는 표식은 없다. 물론 일제 강점기 시절 일제에 맞서 처절하게 투쟁했던 젊은이들의 배움터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허는 전혀 찾을 길이 없다.
단 하나의 안내판조차 없지만, 그래도 학교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찾고 싶어 아파트 옆의 대봉도서관을 기웃거린다. 도서관은 성격상 교육기관인 학교와 가장 닮은꼴의 관공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도서관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경북고등학교가 옮겨가면서 '주민 위로' 차원에서 개관한 시설이다. 도서관 밖 벤치에 앉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항일 투쟁을 돌이켜본다.
식민지 교육 철폐를 요구한 조선 학생들1차 동맹휴교는 1926년 3월에 있었다. 학생들은 '조선인은 야만인'이라고 발언한 일본인 교사의 사직을 요구하며 등교를 거부했다. 하지만 15명이 퇴학을 당하면서 동맹휴교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27년 11월 10일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인 윤장혁·손익기·조은석은 같은 학교 동급생인 남산동 소재 백대윤의 집에 모였다. 그들은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여 독립 운동에 매진하려는 목적으로 비밀결사 '신우동맹(新友同盟)'을 조직한다.
당수 장적우, 책임비서 윤장혁, 중앙집행위원 조은석·백대륜 외 4명으로 간부진을 구성한 장종환·정수광·문철수·권태호·김낙형·상무상·이월봉·정복흥·이봉재·박득룡·장원수·김봉구·장은석·한상훈·황보선·이기대 등 20여 맹원(盟員, 조직원)들은 3개 그룹으로 나누어 학습에 매진했다.
검거 피하기 위해 계속 단체명 바꿔가며 활동그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혁우동맹(革友同盟), 적우동맹(赤友同盟) 등으로 명칭을 변경해가면서 활동하다가 1928년 2월 조직을 해산하였다. 그 후 1928년 9월 8일 다시 '우리동맹'을 결성했다.
1차 동맹 휴교 실패 이후인 1928년 9월 26일 학생들은 2차 동맹 휴교를 계획했고,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민족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며 10월 15일 맹휴를 단행하였다. 이 일로 182명 무기정학, 18명 퇴학, 105명 검거, 24명이 실형을 받았다.
독립운동사의 자취라고는 찾을 길 없는 경북고교 터청운맨션 아파트 단지를 빙빙 둘러보지만 독립운동의 자취라고는 찾을 길이 없다. 1910년대 국내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달성공원에도 기념물 하나 없는 지경이니 이곳에 안내판 등이 없는 것이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지방선거 기간에는 이런저런 출마자들이 '국내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인 신암선열공원을 앞다투어 참배했다. 그들은 과연 독립운동에 진심으로 관심이 있을까? 달성공원에서 청운맨션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 유적지 표시'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을 보면 아마도 정치인들의 행위는 '정치적 쇼'에 지나지 않는 듯 여겨진다.
1919년 9월 2일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일본 예비역 해군대장 사이토오에게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진 강우규 지사는 아들에게 "내가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보람있는 일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신암선열공원을 비롯하여 충혼탑 등 각종 현충 시설을 찾는 정치인들의 행위가 청년들에게 감동으로 느껴지는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청운맨션을 나선다. 인근에 있는 대구사범학교와 대구상업학교 투쟁의 현장을 찾아가려는 발걸음이다. 거기는 여기보다 나으려나? 기대감을 품고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