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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려면 땅이 있어야 한다. 땅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농경을 해야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다.

대구의 땅은 누가 만들어준 것일까? 아득한 빙하기 시대에 대구와 경북 일원은 땅이 아니라 거대한 호수였는데, 누가 언제 그 광활한 물에 흙을 들어부어 논밭을 만들어주었을까?

1998년 10월 15일부터 2000년 2월 29일까지 17개월에 걸쳐 발굴한 결과 금호강 북쪽 물가의 서변동에서 신석기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다. 그래서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은 '이곳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 등의 신석기 시대 유물은 (중략) 대구의 역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는 해설을 내부에 게시할 수 있었다.

거대한 호수였던 대구 일원을 누군가가 흙을 실어와 메웠고, 그 덕분에 주워 먹으며 생명을 유지하는 채집 경제에서 벗어나 '신석기 혁명'을 이루었던 신석기인들이 정착했던 것이다.

호수였던 대구를 땅으로 만들어준 고마운 은인

동구 반야월에서 달성군 다사읍에 이르는 넓은 평야는 금호강이 만들어 주었다. 한때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했던 포항시 죽장면의 깊은 산골 가사령에서 발원한 금호강은 영천시와 경산시를 거쳐 대구의 동구와 북구를 관통한 끝에 달성군으로 접어들어 낙동강에 닿는다. 멀고 먼 거리를 쉼없이 흙을 싣고 달려와 대구 분지에 생명의 농토를 조성해준 고마운 존재, 그가 바로 금호강이다.

금호강(琴湖江)의 이름은 강변의 갈대가 거문고(琴) 소리를 내는 호(湖)수 같은 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경북 지명 유래 총람>에는 '바람이 불면 강변의 갈대밭에서 비파(거문고) 소리가 나고, 호수처럼 물이 맑고 잔잔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금호강 강이름을 최초로 작명한 사람 또는 집단이 누구인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금호강은 왕건 관련 유적을 좌우에 많이 거느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에 푸른색으로 표시된 물줄기가 금호강이고, 녹색으로 표시된 곳이 왕건 관련 유적이다.
 금호강은 왕건 관련 유적을 좌우에 많이 거느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에 푸른색으로 표시된 물줄기가 금호강이고, 녹색으로 표시된 곳이 왕건 관련 유적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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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강은 주변에 왕건 유적을 많이 거느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금호강 북쪽변 서변동과 동화천 중류 지묘동 사이에서 왕건군(軍)과 견훤군이 927년에 벌인 전투 '동수대전'의 결과이다. 왕건은 이곳에서 대패한 후 금호강을 건너 앞산까지 도망쳤다. 그래서 금호강 주변에 왕건과 관련되는 지명들이 많이 남게 되었다.

왕건군이 견훤군에게 부서진(破) 지묘동 고개에는 파군재(破軍峙)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망치던 왕건이 혼자(獨) 멍하니 앉아(坐) 있었던 바위(巖)에는 독좌암(獨坐巖)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양쪽 군사들이 날린 화살(箭)이 강물(灘)처럼 흘러다닌 동화천 하류에는 살내(箭灘)라는 이름이 붙었다.

왕(王)건이 도망칠 때 넘었던 지묘동의 산은 왕산(王山)이 되었고, 왕건이 숨어 지냈던 앞산의 동굴은 왕굴이 되었다. 불로(不老)동은 왕건이 "노(老)련한 청장년 사내들이 보이지 않는(不) 동네"라고 말한 이후 얻은 이름이고, 연경(硏經)동은 왕건이 "선비들이 공부하느라(硏) 책(經)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라고 감탄한 이래 그런 이름을 얻었다.

왕건이 군사들에게 "게으름(怠)이 없어야(無) 한다"라고 훈시한 곳은 무태(無怠)동이 되었다. 왕(王)이 없어진(失) 동네는 실왕(失王)리가 되었고, 어느 정도 멀리 도망을 쳐서 걱정이 줄어들자 왕건의 굳었던 얼굴(顔)이 풀렸다(解)는 동네는 해안(解顔)이 되었다. (해안은 사실 그 이전부터 존재한 동명으로, 민간어원설의 한 사례임이 밝혀졌다.)

왕건과 관련되는 이름이 많이 남아 있는 금호강 주변

왕건이 이곳에 도착한 이래 마음(心)을 놓았다(安)고 해서 안심(安心), 지나갈 때 반(半)달(月)이 밤(夜)길을 비추었다고 해서 반야월(半夜月)이 되었다. 왕건이 숨어(隱) 지낸 흔적(跡)이 남은 은적(隱跡)사, 잠시 머물며(臨) 쉰(休) 임휴(臨休)사, 안(安)전하고 편안하게(逸) 지낸 안일(安逸)암, 혼자(獨) 앉아 있었던 바위(巖)에서 이름을 따온 독암(獨巖)서원도 있다.

이들 중 안심, 반야월, 살내, 독좌암, 불로동, 독암서원, 왕산, 파군재, 연경동, 무태 등은 모두 금호강 주변이다. 그런 만큼 금호강을 왕건 유적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다. 왕건이 건넌 것도 사실일 뿐더러, 금호강이 '호수같이 물이 맑고 잔잔하다'라는 기록도 그 증거로 삼을 만하다. 물가에 갈대가 많다는 점도 그렇지만, 흐르는 강물이 호수같이 맑고 잔잔하다는 것 또한 급류가 없이 평평하게 흐르고 깊이가 얕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금호강변에는 많은 정자들이 있었다. 사진은 그 중 한 곳으로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채응린 등을 모시는 재실 압로정이다.
 금호강변에는 많은 정자들이 있었다. 사진은 그 중 한 곳으로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채응린 등을 모시는 재실 압로정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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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강은 또 많은 정자를 거느린 강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이는 스스로 '추로지향(공자와 맹자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는 의미)'을 자처했을 만큼 유학의 본향을 자부했던 고장을 관통하여 흐르는 강다운 풍경이었다. 내로라하는 유력 선비들은 앞다투어 금호강변에 정자를 지었다.

서사원은 1579년 다사읍 이천리에 이천정사를 지었고, 정구는 1614년 북구 사수동에 사양정사를 지었다. 그 외 윤대승의 부강정, 정광천의 아금정, 이종문의 하목당, 이주의 환성정, 전응창의 세심정, 채응린의 압로정 등 많은 정자들이 있었다. 선비들은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강창나루에서 연경서원 입구의 살내까지 배를 타고 오갔고, 살내에서 연경동까지는 말을 타고 다녔다.

금호강 아름다운 풍경을 뱃놀이로 즐긴 조선 선비들

대구박물관이 금호강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특별 기획전을 열고 있다. '금호강과 길'이라는 제목의 기획전은 지난 6월 19일부터 시작되어 오는 9월 30일까지 진행된다. 기획전은 '1부: 거문고가 우는 호수 같은 강, 금호강', '2부: 금호강 유역의 선사 시대 풍경', '3부: 서풍이 불다', '4부: 동쪽에서 부는 맞바람을 받아들이다'로 나뉘어서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측은 관람자들에게 나눠주는 소형 홍보물의 안내 말씀격인 '바람이 머물다가, 부는 금호강의 경관을 바라보면서'를 통해 "금호강 주변 경관 속에 남겨진 옛 흔적들이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오늘도 이 땅의 고고학자들은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번 전시는 금호강 주변의 영천과 경산, 대구를 중심으로 최신 자료를 수집하여 마련하였다"면서 "우리 선조들의 흔적을 기록하고 전달하고자 굳세게 자리를 지키는 많은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가져본다"라고 기획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태그:#대구박물관, #금호강, #채응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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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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