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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른을 살짝 넘긴 미혼의 동료교사와 점심 식사 후 잠시 걸으며 휴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딱 일주일만 아무일도 안 하며 지내고 싶어요"라고 말하자, "근데 막상 그렇게 하면, 불안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엄마가 해주는 밥 먹으며 함께 사니 일 하는 시간보다 여가가 더 많을 것 같은 동료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대한민국은 '누구나 어떻게든 뺑이치며 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림이든 육아든 사교든 취미든, 일하는 시간 외의 나머지 시간에 뭔가를 촘촘히 우겨넣고 빠듯해야만 사는 거 같은 습관적 성실. 나 또한 그 굴레를 벗어나기로 결심한 지 몇 년째지만 아직도 관성이 잡아당겨 도로 제자리로 돌아갈 뻔 하곤 한다.

우리는 흔히들 여유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을 말하는 게 미안하거나 부끄럽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세상을 살았다. 뭔가 속은 것도 같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다행히 태생이 게으르고 한량 끼가 있어서 깨작깨작 소심하게나마 즐기며 살았지 싶다. 내 남편, 내 새끼들과 할 얘기 많고 얼굴 맞댈 일 많은 거 보면 세상에 완전 속아 넘어간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스럽다.

우석훈 박사님을 알게 된 것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진로강의를 통해서였다. 세 시간 동안 보드마카 한 자루만 달랑 들고 뻔 하디 뻔한 세상과는 온통 다르게 생각하는 한 소년의 강의를 단 1초도 딴 생각 없이 재미나게 들었다.

40대지만 생각은 사춘기 소년같이 울뚝불뚝했다. 마치 세상 경험 많고 머리 좋고 공부 많이 한 천재소년 같았다. 소년이 아닌데도 그렇게 창의적인 사람을 본 일이 별로 없어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강의가 끝나고 강사님의 뒤를 쫓아가 참으로 별나서 키우기가 죽겠는 아들 상담을 했다. 별나라에서 온 것 같은 창의 지성인을 뵙자 우리 아이의 별남에 뭔가 답이 나올 것만 같았던 모양이다. 몇 차례의 질문과 답 뒤에 "저도 아이 낳으면 아이 키우는 아버지들의 모임을 만들고 싶은데, 결혼이 늦어서 그런가 잘 안 생기네요" 하셨다.

몇 년 후 누군가의 페북을 타고 박사님의 페북 글을 보니 육아 포스팅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신 것이다. "와! 우리 편에 촌철살인 경제학자가 들어왔다!" 하는 자축과 함께 페친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육아계에서도 조용한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기대한다.

우석훈의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우석훈의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 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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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페친을 상대로 초대한 우석훈 박사님의 신간, 50대 에세이, <매운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출판 기념 티타임을 알게 되었다. 티타임 소식을 듣자마자 냉큼 책을 주문했다. 사실 <88만원 세대> 말고는 읽은 책이 없어 일종의 팬 미팅에 참석 한다는 게 무척이나 민망스러웠다.

그래서 급히 책 제목만 들어도 피가 끓어오르는 <국가의 사기>도 같이 주문했다. 티타임은 가고 싶고 읽을 시간과 여력은 없어 끼고 다니기만 하다가 참석 하루 전에 후루룩 다 읽었다. 만화책 읽듯 낄낄거리며. 소설도 만화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재미있지?

<88만원 세대>로 만난 창의적인 40대 소년은 50대에도 유쾌하게 소년스럽다. 그는 우리가 오랜 시간 익숙하게 봐 왔던 수많은 현상을 온통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때로는 한순간에 우스꽝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프지 않게 웃긴다.

스스로 찌그러진 모양을 보여주고 그 모습도 결코 나쁘지 않음을 인증함으로써 살아가는 길은 여러 갈래고 저 마다의 힘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책을 읽고 나니 티타임에 참석하고 싶은 열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소풍전야 초등학생마냥 설레는 밤이었다.

티타임은 6월 30일, 토요일 오후 3시, 마포구 합정동의 카페, 빨간책방 3층 갤러리에서 진행되었다. 저자, 우석훈 박사님과 편집자 배소라 편집자님을 비롯하여 7명의 페친겸 독자까지 총 9명이 함께한 조촐한 자리였다.

우석훈의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출판기념 티타임에
 우석훈의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출판기념 티타임에
ⓒ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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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들의 자기소개로 시작된 순서가 배소라 편집자님에 이르자 최근 더 심각해진 출판 산업의 불황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비롯, 각계의 한 자리 제안들도 고사한 채 오로지 육아와 저술 활동에 비중을 두고 있는 우석훈 박사님과 배소라 편집자님을 만나 뵙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하고픈 말이 참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긴 호흡으로 사회의 이모저모를 한 코에 꿰어 생각하고 글로 남기는 일, 그것이 출판 산업 불황이라는 경제적 흐름에 막혀 멈춰져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책 소비를 대폭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에요, 산 것 중에 골라서 읽는 거예요' 라는 김영하 작가님의 말을 인용한 배소라님의 이야기에 오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책을 소비하는 일만으로도 구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도서관에서 빌리기 보다는 책을 사서 쟁여 놓기로, 집안에 책을 위한 공간을 제대로 만들기로 결심하게 되기도 했다.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를 읽으며, 또 한편으로 <국가의 사기>를 통해 사회가 보여주는 정면을 비롯하여 후면과 측면까지 목도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마음의 결대로, 생각의 결대로 살아가도 좋다는 인증을 받은 듯 뿌듯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선 긋는 순간 꽤 많은 사람들은 정신적 무력감을 갖게 된다. 작가의 글에서는 온통 틀에 박힌 생각을 강요받는 한국 사회에서도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도 좋다는 격려의 힘이 느껴졌다.

'이청준 작가의 글이 너무 좋아 필사한 신경숙님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듯',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서 비껴 나와 세상을 바라봐도 살 맛 나는 세상이 있다는 작가의 태도를 구경하고 흉내내어 보는 것만으로도 승자가 될 수 있다. '어떤 세상을 살든 내 마음결만 알아채고 부응한다면 지는 법이 없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긴다.

티타임에서 오고간 대화를 계기로 최소한의 소비로 무한대의 가치를 갖게 하는 일, 독서의 값어치를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좋은 책 한 권은 우주 최고의 가성비 상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손꼽히는 베스트셀러를 비롯하여 최소 35권의 저술 활동을 해온 우석훈 박사님 같은 분 뿐 아니라 독특한 주제와 사회의 영향권 밖의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수많은 작가들이 생계 걱정 없이 계속해서 책을 쓸 수 있는 환경이 되도록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제부터 책 소비 애국자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국에서는 구글맵, 국내에서는 네이버 길 찾기, 인생에서는 <매운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를 강추한다!

덧붙이는 글 | 본인 페북 포스팅의 일부 내용을 이용하여 재구성한 글임.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 오늘부터 행복해지는 내려놓기의 기술

우석훈 지음, 메디치미디어(2018)


태그:#우석훈, #매운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국가의 사기, #출판기념, #티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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