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이 죽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스티븐 케이브는 <불멸에 관하여>에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줄기찬 노력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육체의 생존이다. 현대 의학이 발전하고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수명 탈출 속도(longevity escape velocity)'라는 개념이 나타났다. 예컨대 향후 10년간 인간의 평균 기대 수명이 15년 증가한다고 생각해 보자. 시간은 10년이 지났지만 수명은 15년 증가했으므로 죽지 않는다. 의학적 혁신이 지속해서 일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매일 영양제를 250알이나 복용한다는 레이 커즈와일을 비롯, 수명 탈출 속도를 믿는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하지만 육체적 존재의 시간적 연장이 영원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진시황의 권력과 라이너스 폴링의 과학도 육체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둘째 방법은 부활이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개념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누가 부활하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20대의 나인가, 80대의 나인가? 인간의 육체는 매 순간 조금씩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부활은 어느 시점의 세포 집단을 되살려야 하나? 이렇게 생각해 보면, 부활은 오히려 자아 개념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셋째,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육체가 영원히 사는 것, 또는 그 육체가 되살아나는 것에 비해,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이 가진 호소력은 무서울 정도로 강력하다.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다가올 처형을 환영하고 있었다.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죽음이란 곧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독약을 마시고 평안하게 죽었다. (140쪽)영혼 담론의 강점은 무엇보다 육체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대개의 종교가 제시하는 천국은 영혼을 수용하는 곳이다. 문제는 영원을 사는 영혼이 행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영원이란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는 개념이다. 아무리 기쁜 일이라도, 그것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과연 기쁠까?
한 기독교 안내서는 내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질투나 경쟁, 거짓, 부패와 소문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모두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223쪽)일단 모두가 모두를 사랑한다는데, 과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 저자도 지적하듯, 저렇게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한 사람이 과연 나와 동일한 사람일까? 내세의 영광된 모습은 또한 인간 중심적이다. 예컨대 천국에 고기가 넘쳐난다면, 동물들에게 그것이 천국일까? 미녀 72명을 거느리는 이슬람 남자들의 천국에서 여자가 과연 행복할까?
논리적 허점에도 불구하고, 영혼과 내세에 관한 관념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강력하다. 우주적 정의가 어딘가에서, 우리가 죽은 다음에라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불의에 가득 찬 세상을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엄청난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영혼 담론 역시 우리에게 불멸을 약속해주지 못한다. 의식이 뇌 활동에 기인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이 끝났다고 봐야 한다.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환자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듯이, 뇌 일부만 파괴되어도 자아, 즉 영혼은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뇌가 완전히 부패하여 사라지는 죽음에 직면하여 영혼이 어떻게 보존된다는 말인가.
죽음으로 인해 두뇌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서도 영혼이 과거의 인지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제 두뇌의 일부만 파괴됐을 뿐인데도 인지 능력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들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254쪽)네 번째 영생의 방법은 다름 아닌 유산(legacy)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요절했지만 불멸의 기록을 남겼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저자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우리는 두 개의 세상을 살아간다. 하나는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하는 자연의 세상,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들만이 공유하는 상징의 세상이다. 우리의 육체가 첫 번째 세상을 등진 다음에라도, 우리는 밈(meme)의 형태로 두 번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불멸의 이름으로 남기 위해 아르테미스 신전에 불을 지른 헤로스트라투스는 물론, 그의 욕망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그에게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을 내린 당시 사람들 역시 유산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을 어느 정도는 믿었다고 볼 수 있다.
자손 역시 유산의 한 형태다.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가 유전자의 운반기계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이나 고양이와 같은 개체가 아닌, 그 개체를 지배하는 유전자를 생명의 기본 단위로 본다면, 우리는 계속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남성들은 스스로 아기를 낳을 수 없기에 전쟁을 벌이거나 글을 쓰는 셈이다. (307쪽)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라는 의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잠을 설친다. 나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내 자손의 의식이 나의 의식과 다름은 명백하다. 명성을 남긴다고 해서 의식이 함께 남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
불멸을 도모하고자 하는 네 개의 전략, 즉 생존, 부활, 영혼, 그리고 유산은 모두 실패했다. 우리는 죽음의 운명이라는 피할 수 없는 불안(Angst)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저자는 이에 대해 '지혜'라는 해답을 제시한다.
우선 저자는, 우리가 불멸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보르헤스의 작품 <죽지 않는 사람들>에서 묘사되는 불멸자들의 삶은 냉담과 무관심으로 가득하다. 영원히 살게 된다면, 아무리 확률이 낮은 사건이라도 결국에는 일어나고 만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TV에 출연해서 요리를 하고, 벨기에 총리로 취임할 것이며, 술집 스트리퍼로 일하게 될 것이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한 사람은 곧 다른 모든 사람이다." (356쪽)무한에 직면하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개별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죽음에 관한 또 하나의 지혜는, 죽음이 우리와 무관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죽음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고 말했다. 죽음은 이미 삶이 종료했음을 의미한다. 어차피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의식 차원에 있다. 죽음이란, 의식의 종료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의식할 수 없다.
지혜의 길로 나아가는 두 번째 단계는 죽은 상태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말이 안 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372쪽)대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로, '비개인화'를 들었다. 에고의 벽을 허물고, 우리의 삶을 우주적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하라는 것이다. 북미 원주민들의 '위대한 영혼(The Great Spirit)'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들은 우리가 위대한 영혼에서 나오고, 위대한 영혼으로 돌아간다고 믿지 않았던가.
TED 강의에서, 저자는 불멸에 대한 믿음을 '편견(bias)'이라고 부르며, 편견이란 잘못된 믿음이 체계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잘못된 신념을 잉태했다. 불멸에 관한 저 네 가지의 신화는 다만 편견일 뿐이다.
저자의 결론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사는 것. 요즘 유행하는 마음챙김(mindfulness)의 결론으로 돌아가는 것이 식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삶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고, 같은 해답을 얻었다면, 그것은 식상한 결론이 아니라 진정한 해답일지 모른다. 내일 당장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게 살되, 내일 죽지 않더라도 역시 후회하지 않도록 살라는 것이 작가의 결론이다.
저자는 우리의 삶이 마치 책과 같다고 이야기하며 글을 맺는다. 아름다운 비유다.
비록 우리의 삶은 시작과 끝으로 막혀 있지만, 그 속에는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고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삶은 '한 권의 책'과도 같다. (3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