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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김광석 팬이었다. 당시는 룰라가 데뷔한 해로 '날개 잃은 천사' 엉덩이 춤이 유행하던 때다. 레게와 힙합을 주제로 한 혼성그룹 룰라가 가요 프로그램 5주 연속 1위를 2번이나해 골든컵을 수상하던 그때 친구는 김광석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라 어떤 노래인지 궁금해서 들어볼까 했는데 앨범 자켓에 있는 가수 얼굴이 못생겨서 그만뒀다.

그런데, 고3이 되기 직전 고2 겨울방학 보충 때 김광석이 사망했다. 우산도 거부하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비를 맞으며 하교하는 친구를 보고 나서 김광석 노래를 들었다. 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들었는데 정작 내가 위로 받았다. 구슬픈 목소리,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건드리는 감정이 우울한 고3을 위로해줬다. HOT가 데뷔해 팬덤을 형성하던 그때 친구와 함께 김광석을 들었다.

가사보다는 멜로디와 김광석의 목소리를 들었던 고3시절이 지나고 20대 중반 연애를 할 때는 김광석 노래 가사를 들었다. 그 뒤 서른 즈음에는 너무 바빠 어떤 노래도 듣지 못 했다. 29에서 30으로 넘어가는 시기 많은 이들이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30이 주는 중압감과 무게에 저항하고 싶고, 20대 청춘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시류가 못 마땅했다. 김광석을 모르던 사람도 그의 '서른즈음에'를 한 번씩 듣고 넘어가는 서른.

'그까짓 서른 별거라고. 다들 유난이야.'

서른을 맞이하며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 나는 남들과 다르다며 콧방귀를 뀌다 올해 40이 되어 '서른즈음에'를 무수히 반복해 듣고 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가슴을 후벼파는 가사다. 30대에는 이뤄야할 목표만 보여서 지나간 청춘이 아쉬운 줄 몰랐다. 40이 되고 하루하루 자라는 아이를 보니 잡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졌다. 39살일 땐 누가 나이를 물어도 당당했고, 서류에 나이를 작성할 때도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은 40이라고 적는 손이 움츠러 들고, 마흔이라고 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없다. 40이라는 숫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빈도가 더해지는 건망증도 나이탓인 거 같고, 아이 유치원 학부모 중 40대는 나밖에 없는 거 같고,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해서 꿈을 이루기엔 늦은 나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나이를 고려 대상으로 삼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 나이에 시작해서 언제...'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렇게 자꾸만 작아지는 나를 붙들고자 98세 할머니 이야기를 읽었다.

 사노 요코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사노 요코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 상상스쿨

어느 곳에 98세 할머니가 씩씩한 수컷 고양이와 살고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날마다 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할머니 고기 잡으러 가요."
"하지만 나는 98살인걸. 98살 난 할머니가 고기를 잡는 건 어울리지 않아."


할머니는 의자에 앉아 밭에서 따 온 콩꼬투리를 깐다든지, 낮잠을 잔다든지 했습니다. 고양이는 날마다 고기를 많이 잡아 돌아왔습니다. 99살이 되는 생일날 할머니는 아침부터 케이크를 만들었습니다. 할머니는 고양이에게 초를 사오라고 했습니다.

고양이는 서둘러 초를 사러 갔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초를 사오다 그만 봉투가 찢어져 초가 5자루 밖에 안 남았습니다. 할머니는 5자루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며 초를 꽂고 불을 켰습니다. 할머니는 케이크 초를 "1개, 2개, 3개, 4개 5개" 세며 올해 5살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고양이는 할머니에게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5살인 걸... 어머, 그렇지! 5살이면, 고기 잡으러 가야지."

할머니는 고양이와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이렇게까지 멀리 온 적이 없었습니다. 꽃이 많이 피어 있었습니다. 5살은 어쩐지 나비가 된 거 같았습니다. 시냇가에서 고양이가 펄쩍 뛰는 걸 보고 같이 따라 뛰었습니다.

5살 난 할머니는 94년 만에 냇물을 뛰어넘었습니다. 냇가에서 고양이는 바지를 벗고 냇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5살 할머니도 같이 물어 뛰어 들었습니다. 할머니와 고양이는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어, 나 어째서 좀 더 일찍 5살이 되지 않았을까. 내년 생일에도 양초 5자루를 사 가지고 오렴."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는 자기 나이가 많다는 것에 갇혀 있던 할머니가 생일초가 모자라 5살이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그림책이다. 98살일 때는 할 수 없었던 일을 5살이 되고 나서 할머니는 척척 해낸다. 늘 '하지만'을 말하던 이 할머니처럼 나이에 자신을 가두고 옴짝달짝 못하는 일을 우리도 흔히 겪는다. 특히, 연령에 따라 높임말을 쓰고 권위가 부여되는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중요한 요소다.

올해 여든이 된 윤석남 화가가 처음 개인 전시회를 했을 때가 42세였다고 한다. 그녀는 전업주부로 살다 나이 마흔에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하고 2년 뒤 개인전을 열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그녀가 우리나라 화단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나이'라고 한다.

당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중견 화가들이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윤 작가를 동년배로 대우해 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만큼 나이가 중요하다고 한다. 역으로 미술을 전공한 젊은 20대 작가가 작품을 선보여도 주목받을 수 없단 얘기다.

윤석남 작가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나이는 개인이 사회에서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힘들지만 벗어나야한다.

밝고 긍정적이지만 소심하고 떡볶이와 그림책을 좋아하는 나를 설명하는 데 나이라는 숫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한 개인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나이보다 중요한 다른 요소가 더 많다. 숫자를 지우고 나면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가 전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전에 보이지 않던 걸 볼 수 있다.

이제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는 그만 들으려 한다. 청춘은 좋은 것이고 노화는 멀리해야 할 것으로 구분해 동안과 젊음을 쫓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아야겠다. 0세부터 100세까지 100가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텐데 그 중 짧은 청춘의 시기만 추구하고 회상하며 살면 나머지 인생이 덧없어질테니. 더욱이 나를 제대로 설명해 주지도 못하는 나이에 주눅 드는 일은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오늘을 허비하는 일이다.

40에 글을 쓴 박완서 작가, 그림을 그린 윤석남 화가처럼 나를 찾는 시간인 40을 그냥 숫자로 덤덤히 받아들여야겠다. 숫자가 갖는 사회적 의미에 신경쓰기보다 내 몸과 마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사노 요코 지음, 엄혜숙 옮김, 상상스쿨(2017)


#사노요코#나이는숫자일뿐인가#하지만하지만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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