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 세 명을 뽑자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조선의 세종대왕, 이순신을 뽑지 않을까 싶다. 광활한 만주 대륙을 정복하고, 길이 남을 한글을 창제하였으며, 백전 백승으로 나라를 지켰다. 이 세 위인은 드라마(<태왕사신기>, <뿌리깊은 나무>)와 영화(<명량>)은 물론 소설(<뿌리깊은 나무>, <칼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왕에겐 정치적 내홍이 없었다. 큰아버지 소수림왕이 국가의 틀을 완벽히 잡고 아버지 고국양왕이 잘 이은 와중에 뒷탈 없이 정복 전쟁에만 힘을 쏟은 광개토대왕, 아버지 태종이 대대적 숙청으로 완벽하게 왕권을 강화한 와중에 백성들을 위해 힘을 쏟은 세종대왕. 이러나 저러나 그들은 '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이순신에게는 평생 정치적 내홍이 뒤따랐다.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게 생긴 마당에 오직 이순신밖에 없을 정도의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으로만 향하는, 향할 수밖에 없는 민심을 두려워한 왕(선조)과 왕을 따르는 무리들의 시기와 질투. 이순신은 외부의 적을 절대적으로 막아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내부의 적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을 전쟁 내내 겪어야 했다.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절대적 영웅임에 분명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이리저리 휘둘리고 고민하고 자책하고 그러면서도 앞뒤를 막아야 하는, 철저히 발가 벗겨진 인간 이순신을 알아야만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순신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떻게 하고 싶었을까. 어떻게 했을까. 김훈 작가의 명작 소설 <칼의 노래>는 영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알게 하는 좋은 기회를 선사한다.
이순신이 감당해야 했던 것, 삶과 죽음
소설은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부터 시작된다. 때는 1597년 4월 초, 같은 해 1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고된 신문을 받은 후 3개월 만에 풀려난 것이다. 7월에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8월 초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다. 그에게 남은 함선은 12척뿐이었다. 그는 12척으로 명량해전의 기적을 일으킨다.
명량의 기적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에겐 참으로 비현실적인 고민이 따라다녔다. 어디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항상 사지(死地)를 물색했다. 전쟁을 치르며 이순신에겐 가족이 하나둘 죽어갔다. 당시 조선 어느 누가 그러지 않았겠냐마는, 머나먼 곳에서 나라의 명운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그에게 가족의 죽음을 생각하고 슬퍼하는 건 일종의 사치와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수많은 적들을, 적들이지만 누군가의 가족임에 분명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였고 그 때문에 수많은 백성과 아군들도 죽어나갔다. 그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유의미한 게 아니었다. 무의미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내가 죽으면 조선은 끝장이다'.
사지를 물색한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적의 완벽한 궤멸과 절대적인 철수를 지켜본 후에야 눈을 감을 수 있었을 테고, 혹시라도 모를 그 이전의 죽음으로 조선 전체가 피로 물들지 않게 또는 덜 물들게 전라도 해안이 아닌 경상도 해안에서 죽어야 했다. 그에게 삶은,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김훈은 이순신을 짓누르는 그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다. 분명 이순신이라는 무게에, 이순신이 느꼈을 삶과 죽음의 무게에 처참하게 짓눌렸을 텐데, 그것들을 온전히 글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순신이 감당했어야 할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참으로 많이 힘들고 아팠겠다.
영웅 아닌 인간 이순신시종일관 이순신이 염두에 두는 건 적만큼 알 수 없는 임금 선조의 의중이다. 임금은 이순신을 죽여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선의 국토가 유린당하는 와중에 백전 백승의 그에게로 쏠리는 민심이 두려웠다. 하지만 임금은 이순신을 살려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임금은 적에게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다. 이순신은 살았고 적 덕분에 적 앞에 섰으며 적을 무찌르고 나서는 임금의 손에 죽을 것이었다.
진정한 절망은, 현재의 좌절에서 오지 않는다. 미래의 희망없음에서 오는 것이다. 이순신에게 미래 따위는 없었다. 결정된 죽음만이 있을 뿐.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래서 사지를 물색하는 일뿐이었다. 그가 싸운 건 외부의 적(왜)과 내부의 적(임금), 그리고 무의미한 이 세상 그 자체였다.
이순신은 세상에 칼로 베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음에 절망했다. 오직 적들만 베어버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벨 수 있는 걸 벴다. 하지만 임금을 벨 수 없었고, 무의미를 벨 수 없었다. 악몽도, 끼니도, 자책도, 그 어느 것도 칼로 벨 수 없었다. '인간' 이순신에게 칼로 벨 수 없는 것들은 참으로 힘겹게 다가왔다. 그는 괴로웠다.
<칼의 노래>에서의 이순신은 인간 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 유약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맹렬히 진격하는 적의 칼끝을 피해 물러서기만 반복하다가 매복한 아군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뭍의 적군 포탄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정박되어 있는 적군 배를 섬멸하고, 물길과 뭍지형을 살펴 적이 스스로 섬멸되게 하고... 그가 행했던 백전백승 전투는 화려하지 않았고, 그의 전쟁은 그 전투들에 있지 않았다.
이 소설을 기점으로 이순신은 더 이상 절대무력으로 적에게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영웅전설의 주인공이 아니게 되었다. 이순신은 절대적으로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화려하지 않은 완벽한 승리만을 원해야 했던 망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완벽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던 그,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순신은 역사상 그 어느 위인보다 추앙받아 마땅하다. 이 책은 완벽히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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