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군대 내 성범죄의 책임을 여군에게 돌리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인 가운데,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해병대에서 근무했던 방혜린 군인권센터 간사는 "군대 내 만연한 인식이 표출된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9일 서울 육군회관에서 열린 성고충전문상담관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군대 내 회식 규정을 언급하며 "회식 자체에 대해서 승인을 받게끔 한다"라며 "그런 것도 어떻게 보면 여성들이 행동거지라든가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된다"라고 말했다. 송 장관은 이어 자신의 아내가 딸에게 교육한 내용을 소개하며 "(아내가 말하길) 여자들 일생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많다"라며 "이걸 깨닫게 해줘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날 간담회는 송 장관이 병영 내 성폭력 피해자 상담과 성폭력 예방활동을 하는 성고충전문상담관 11명을 불러 모아, 군대 내 성범죄 근절을 논의하자고 만든 자리다. 그런 자리에서 여군에게 책임을 돌리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다.
논란이 일자 이날 송 장관은 "일부 내용을 생략하고 쭉 이어서 말하지 못하면서 의도와 정반대로 여성 비하 발언을 한 것처럼 비쳤다"라고 해명했다. '행동거지' 발언은 회식 규정을 만들 때 여성에게 책임을 돌리는 듯한 내용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고, '여자 인생' 발언은 아내의 주장일 뿐 본인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송 장관의 성차별적인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어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해 11월 27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했을 당시 송 장관은 "식사 전 얘기와 미니스커트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하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해자 탓하는 군 수뇌부...펜스룰·군대 내 성범죄 무혐의로 이어져송 장관의 발언에 대해 해군으로 복무 후 전역해 군인권센터에서 여군인권담당관을 맡고 있는 방혜린 간사는 "송 장관의 여군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일갈했다. 방 간사는 "군대 내 성폭력 가해자에 대해 일벌백계하고 처벌한다고 하지만 국방부 장관부터가 피해자를 탓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라며 "이런 상황에서 (처벌, 일벌백계 등 발언은) 소용이 없다"라고 비판했다.
군 수뇌부의 왜곡된 인식은 군대 전체로 퍼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방 간사는 "군대라는 곳은 최고 지휘관의 의도를 받아들여, 예하부대들이 그런 과제들을 수행하는 구조다"라며 "최고 지휘관이 피해자를 탓하는 인식을 하고 있으면 밑에 부대에서는 그런 방향의 정책을 수립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피해자 탓을 하면 펜스룰이 생기게 된다고 했다. 방 간사는 "일선 지휘관들이 '너네(여군)도 처신 똑바로 해야한다'는 식의 발언을 여군인력 간담회 등의 자리에서 많이 한다"라며 "이외에도 여군들은 몇시까지 숙소에 꼭 들어가야 하고 여군 혼자서 하면 안 되는 행위 등을 규정하고 회식 금지 등의 정책들이 나오기 시작한다"라고 했다.
또 그는 "일선 부대 지휘관들이나 수사관들에게까지 이런 인식이 내려가서 성범죄 수사 과정에서 피해가 생긴다"라며 "이들이 피해자의 사소한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문제 삼아 '사실은 이런 것 아니냐'는 식으로 진실 공방을 시켜 결국 무혐의가 된다"라고 했다.
그러다보니 여군들은 성범죄에 노출돼도 군대라는 조직에 기댈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국가인권위원회가 육·해·공군과 국방부에 근무하는 여군 17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절반이 넘는 54.1%(92명)가 군내 성폭력에 대해 '심각'(47.6%, 81명) 또는 '매우 심각'(6.5%, 11명)하다고 답한 반면, '심각하지 않다'는 답변은 1.2%(2명)에 그쳤다.
반면 군대 내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사건이 공정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그렇지 않다(42.4%)'고 답변하였다. 성폭력 피해 당시 대응과 관련하여 응답한 42명 중 26명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라고 답변하였다.
방 간사는 "여군들은 (피해자를 탓하는 듯 한) 송 장관의 발언에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송영무 장관이 그런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된 것일 뿐,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라며 "피해자를 탓하고 가해자는 되레 보호하는 군대의 분위기는 육군 72사단장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그는 "육군 72사단장은 '72사단 여군 인력 간담회'를 마친 뒤, 여군을 불러내 성추행을 했지만 보직해임이 되지 않은 채 수사를 받았다"라며 "군인권센터에서 문제제기를 한 뒤에야 보직 해임됐다. 전형적으로 가해자를 보호하는 사례"라고 일갈했다.
"성 인식 바로잡지 않으면 군대 고사할 것"군대가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고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성폭력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 하는 조직에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하겠느냐"라며 "국방부는 여군을 늘린다고만 하기보다 그들이 복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방 간사는 "피해자를 탓하는 성감수성, 조직문화를 없애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신고를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폭력이) 나의 문제로, 내 처신의 문제로 비춰질까봐 두려워서다"라며 "그런 것들이 인사상 불이익 등 2차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서 신고를 못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성범죄 전담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방 간사는 "기존 시스템에서는 피해자가 신고를 해도 2차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며 "성범죄 사건만을 전담으로 수사하고 피해자를 전문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국방부 장관 직속의 성범죄 전담기구를 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은 사라졌지만 '회식지킴이제도' 같은 것이나 여군의 보직 제한, 부대 배치에 있어서의 여군 비율 제한 등 펜스룰이 없어져야 한다"라며 "여성 군인들을 '여군'이 아니라 남성과 동일한 '군대 내 조직원'으로 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