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는 그것을 즐겨 보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등이 상반기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르며 '캐릭터 에세이'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들은 단순히 그 시절 즐겨 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삶에 대한 작가의 사유나 철학을 덧붙여 놓았다. 어른이 되어 다시 본 이야기들은 모두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그린 게이블의 앤>을 원작(1908)으로 하여 1979년 일본의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에 의해 50회 연작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1985년, 1986년에 우리나라에 방영되었으니 지금 삼사십 대는 어린 시절 앤을 보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앤은 마릴라와 매튜가 원하던 남자아이가 아니라서, 파양을 당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꿈꾸던 초록지붕 집의 아이가 아니라, 달아나고 싶었던 고아원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앤은 말한다. "전 이 드라이브를 마음껏 즐기기로 작정했어요. 즐기겠다고 결심만 하면, 대개 언제든지 그렇게 즐길 수가 있어요!" -p.51
필자는 성인이 되어 <빨강머리 앤>을 읽으며 너무 희망적이어서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백영옥 작가는 그 비현실적인 희망을 보며 지친 삶을 위로받았다. 지쳤을 때, 외로울 때, 불안할 때, 울고 싶을 때 그녀는 앤을 찾았고, 앤이 하는 말에서 다시 희망을 얻었다고 말한다. 살아보니 앤의 말이 다 맞는 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앤의 성장기를 보며, 그 안에서 나름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앤을 보며 그녀 역시 자신의 길을 찾았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마음껏 기뻐하고, 슬퍼할 거예요. 이런 날 보고 사람들은 감상적이라느니,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표현한다고 수군거리겠지만 나는 삶이 주는 기쁨과 슬픔, 그 모든 것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마음껏 느끼고 표현하고 싶어요. -p.276
무뚝뚝한 마릴다에게 와락 안겨 아주머니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따스함을 드러나게 하는 아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선물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생각해 준 매튜 아저씨의 마음에 더욱 감사할 줄 아는 아이,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는 용기를 가진 아이, 진정한 행복을 알고 자연을 느낄 줄 아는 아이,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아이, 그러한 앤에게 그녀가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 이 책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꿈을 이룬다는 건 그런 뜻이다. 앤은 원하는 직업을 얻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사랑하는 아줌마, 아저씨와 익숙했던 고향을 떠나는 슬픔을 겪을 것이다. 다이애나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연애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망설이는 이유는 그 결정으로 지불해야 하는 몫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우리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몫이다. -p.172
어릴 적엔 그저 발랄하고 즐거운 말괄량이 앤만 보았다면 어른이 된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는 앤을 본다. 어른이 되고는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과 그때의 마음을 앤을 통해 떠올린다.
그리고 어떻게 어른이 되었나, 지금 나의 모습은 어릴 적 내가 꿈꾸던 그 모습이 맞나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세상을 알아가며 천진난만했던 모습은 깊은 곳에 담아두고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앤의 모습에서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삶이란 다 그런 것임을 다시금 알게 된다.
앤의 대사도 무척 좋지만 앤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작가의 마음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매력적인 책이다. 책의 중간 중간 어릴 적 보던 그 영상이 앤의 대사와 함께 삽입되어 있어 그리움도 느껴진다. 책을 다 보고 나면 작가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어 영상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두 아이의 엄마인 필자는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다는 것은 재미 그 이상의 추억이라며 아이들이 애니메이션 보는 것을 많이 허용한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아이들은 좋아하는 몇 가지를 달달 외울 만큼 돌려본다.
친구들끼리만 모여 살며 종일 노는 뽀로로, 숲에서 매일 새로운 동물이나 곤충을 만나 즐거워하는 아기 까투리(꺼병이)들, 나무에 걸린 구름으로 빵을 만들어 먹고 둥둥 떠다니는 고양이들. 함께 보고 있노라면 똑같은 장면에서 여지없이 낄낄대며 웃는 아이들을 보며 어쩜 저러나 싶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도 이 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이 아련해지는 때가 오리라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