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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날씨가 무서울 정도로 덥다. 집안에 에어컨을 거의 항상 틀어놓는데도 고양이들은 더운지 타일로 된 쿨매트나 현관 타일 바닥을 찾아 눕는다. 고양이는 강아지보다는 더위를 잘 견디는 편이라지만, 요즘처럼 35도를 넘나드는 날씨에서는 그 통계를 적용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고양이들은 개처럼 혀를 빼물고 헥헥거리며 체온 조절을 하진 않는다. 대신 티 나지 않게 조용히 숨이 가빠진다.

우리 집 제이는 숨이 헐떡거리는 증상으로 병원에 갔다가 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 고양이다. 지금은 건강해졌지만 나는 항상 제이의 호흡수를 유심히 체크하고 있다. 고양이는 아주 사소한 변화로 건강 이상의 신호를 알아채야만 하기 때문이다.

최근 더운 날씨 때문인지 베란다 캣타워에 누워 있는 제이의 호흡이 빨라진 것 같아 계속 지켜보며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시원한 방 안에 들어오니 다시 정상적인 호흡을 되찾았다.

하지만 나는 그날 밤에 제이가 입을 벌리고 헐떡거리며 개구호흡을 하는 꿈을 꿨다. 혹시나 어디가 아픈 게 아닐까 불안했던 마음 탓인지 꿈에서도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이 작은 동물이 내 일상을 얼마나 거세게 뒤흔들 수 있는지를 이미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하는 집사 곁으로 와서 잠드는 고양이 제이
컴퓨터하는 집사 곁으로 와서 잠드는 고양이 제이 ⓒ 박은지

고양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최근에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이 나에게 궁금해하며 물었다.

"고양이는 주인도 몰라보지 않아요?"

수없이 들은 질문에 예전에는 구구절절 우리의 에피소드를 설명했지만, 이제는 그냥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해 버린다. 아니라고, 고양이도 사람과 공감하는 동물이라고. 상대방의 눈에 의아함이 어리지만 고양이와 집사의 관계를 금방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고양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척 궁금하다. 고양이는 집사를 밥 주는 거대한 고양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도 있고, 자기가 사냥을 가르쳐야 하는 능력 없는 고양이라고 여긴다는 이야기도 있다. 혹은 소설 <고양이는 안는 것>의 고양이 요시오처럼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고양이를 사랑하는 만큼 고양이도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집 고양이들이 항상 나를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끔은 얼굴 앞까지 다가와 보드라운 뺨을 비비는 건 아무에게나 해주지 않는 일이다.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고양이도 집사를 사랑하고 있다는 근거를 단숨에 수십 개쯤은 들 수 있을 것이다.

고양이가 주는 위로 

<고양이는 안는 것>은 아오메 강과 테코스테 다리 부근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짧은 단편으로 엮은 것이다. 각기 다른 인물들의 사연이 하나의 전체 이야기를 이룬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스쳐 지나간 등장인물의 사연이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주된 스토리로 다루어지는 식이다. 사람과 고양이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진행된다는 것도 독특하다.

책에게 '고양이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색약을 가지고 있던 화가 고흐였다. 고흐가 보는 세상은 고양이가 보는 세상과 비슷하다. 빨간색을 잘 알아볼 수 없는 그는 좀처럼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부족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고양이 '키이로'에게 그는 위로 받는다.

"키이로는 나와 같은 세계를 보고 있어. 나의 색각은 고양이의 색각과 같아. 사람에게는 드문 증상이지만 소수라고 해서 그걸 비정상으로 치부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너희들하고 보이는 게 다른 건 확실하지만,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어. 빨강도 파랑도 초록도 내 방식으로 보고 있어. 많다고 정상이라고 하고, 적다고 비정상이라고 하는 건 다수의 오만이 아닐까?" (117p)

어느 순간 키이로는 자신에게 고흐가 필요한 만큼 고흐에게도 자신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키이로에게 고흐는 안정적인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는 사람이지만 고흐에게 키이로는 안아줄 수 있는 존재다. 색약이 있는 고흐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실패작인지도 모르지만 키이로는 그를 이렇게 표현한다. '흔하지 않은, 귀중한 실패작'이라고.

사람과 고양이가 살고 있는 세계 

사람과 고양이는 전혀 다른 종이고, 말도 통하지 않는다. 고양이에게는 고양이의 본성에 따른 행복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그 마음을 근본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기꺼이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화를 내지도,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좌절하지도 않는다. 고양이도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몇 번인가 반복해서 말을 걸어오지만 결국 '야옹' 하고 답답한 듯 체념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또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체온을 나눈다.

사람들과 고양이는 각각의 사연과 기분과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세상에서 묘하게 연결된다. 그중 내가 제공하는 몫의 환경 속에서 내 고양이는 행복할까? 고양이의 삶에 나의 존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면 새삼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또 이 만남이 기적 같기도 하다. 반대로 내 삶에 고양이가 들어온 것 역시 엄청난 사건이었다.

"어이, 키이로. 너는 다시 돌아온 몸이잖아. 집고양이도 해봤고 길고양이도 해봤으니까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 허심탄회하게 말 좀 해봐."
"그건 뭐, 운명이니까."
"뭐야 그게! 그건 대답이 안 돼!"
"정답은 없어." (172p)

우리가 만나는 것과 만나지 않는 것,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일이었을지 정답은 없다. 다만 중요한 건 사람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고, 고양이는 사람에게 거리를 좁힌다는 점이다. 신뢰감이 생기고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고양이는 안을 수 없다. 길에서 친근하게 다가오는 애교 많은 길고양이도 아무에게나 안는 것까지 허락하지는 않는다. 서로 눈을 보고 말을 걸고 밥을 먹으면서, 그렇게 우리는 특별한 사이가 되어가는 것이다.

 옆자리에 앉는 고양이 달이
옆자리에 앉는 고양이 달이 ⓒ 박은지

센이 센키치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애처롭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기 고양이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얽매이는 삶을 동경했다.
그것이 설령 슬픈 결말을 맞았다고 할지라도. (276p)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 아주 많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더라도 한순간의 서운함 때문에 가장 먼 사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분명히 말이 통하고, 비슷한 전제가 깔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고양이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기에 누군가는 '버리면 간단히 끝나 버리는 단순한 관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삶을 그대로 내버려두면서도 서로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고 있다.

서로의 삶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건 언젠가 다가올 슬픈 결말까지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다른 존재로 인해 슬퍼할 일도 많아진다는 뜻이라서, 필연적으로 괴로운 일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나보다 수명이 짧은 고양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도, 나는 내가 안을 수 있는 친밀한 고양이들을 만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 세계를 관통하는 아주 특별한 마음으로 이어져 있기에. 


고양이는 안는 것

오야마 준코 지음, 정경진 옮김,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2018)


#서평#고양이#고양이는안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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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개 고양이 집사입니다 :) sogon_about@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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