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민사소송을 두고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사법부가 거래한 의혹이 짙어지는 가운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외교부 장관에게 직접 법관 해외파견을 청탁한 정황이 드러났다. 사법농단 의혹 중 대표적인 '재판거래' 사례로 꼽히는 강제징용 소송에 개입한 윗선이 드러난 셈이다.
19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2014년 초부터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에게 수차례에 걸쳐 '법관 해외 파견 자리를 확보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검찰은 지난 2일 외교부 압수수색 과정에서 해당 사실을 확인했으며, 8월 13일 검찰 조사를 받은 윤 전 장관도 같은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전 대법원장이 외교부 장관에게 직접 청탁을 하기 전,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은 2013년 10월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법관의 해외공관 파견을 요구했다. 외교부는 면담 뒤 "대법원 애로사항은 판사 해외공관 파견 확대. Deal(거래) 거리 有(있다)"라는 내용의 문건을 작성했다.
물밑에서 청탁이 이뤄진 뒤에는 2013년 12월 1일 '삼청동 비밀회동'이 진행됐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과 윤병세 전 장관, 황교안 전 법무부 장관 등을 자신의 삼청동 공관에 불러 모았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일제 강제징용 민사소송을 지연시키거나 전원합의체로 판결을 넘겨 일본 기업의 손을 들어줄 방안을 논의했다(관련 기사 :
김기춘·차한성·윤병세가 삼청동에서 만난 이유).
일제 강제징용 민사소송은 태평양전쟁 강제동원 피해자 9명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각각 2005년과 2000년에 제기한 소송이다. 1·2심 재판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이미 소멸된 점 등을 이유로 일본 기업의 손을 들어줬으나 2012년 대법원은 사건을 다시 판단하라며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파기환송심은 일본 기업이 원고에게 피해보상금을 배상하라는 결론을 냈고, 2013년 8월과 9월에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삼청동 비밀회동' 이후 양 전 대법원장은 외교부 장관에게 직접 법관 해외파견을 청탁했고, 실제 이명박 정부 시절 중단됐던 법관 해외공관 파견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다시 진행됐다. '사법협력관'은 2013년 2월 네덜란드 대사관으로 시작해 2014년 2월 주유엔대표부, 2016년 2월 주제네바대표부로 확대됐다.
외교부의 민원 또한 받아들여졌다. 대법원은 새로운 쟁점이 없는 경우, 파기환송심 결과를 그대로 받아 4개월 이내에 상고를 기각한다(심리불속행 기각). 그러나 일제 강제징용 민사소송 선고는 기약 없이 미뤄졌고, 현재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대법원은 7월 27일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