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조용하고 평화롭던 '책을 씨' 집에 한 무리의 포도청 관원들이 들이닥쳐 할아버지를 잡아가 버린다. 할아버지가 "제국의 풍속을 문란하게 만드는 유언비어를 날조해 사방팔방 퍼뜨린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누굴 만나거나 하는 일 없이 소일삼아 책을 읽거나 하면서 조용하게 사는 할아버지가 대체 어떻게 그런 죄를 저질렀다는 것일까? 대체 할아버지는 어디로 끌려간 것일까? 오직 할아버지에게 의지해 자라온 책을 씨는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이런 책을 씨에게 홀연 나타난 '섭구 씨'는 대뜸 "책을 얼마나 썼냐?"며 다그친다. 이어 "책을 쓰러 가자"고 재촉한다.
지독한 책벌레인 할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 못지않은 책벌레였으며 자신을 낳다 죽었다는 어머니와 역시 책벌레로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씨는 처음 보는 섭구 씨를 믿고 따라 나선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경고한 포도청 관원들에게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책을 씨와 섭구 씨가 첫날 머물게 된 곳은 알고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새끼손가락만을 쏙쏙 잘라가 버리는 그런 마을의 어느 집. 둘은 모두가 잠든 한밤중 들릴 듯 말듯 이어지는 음산한 소리에 이끌려 어떤 방까지 가게 된다. 두 사람 눈에 들어온 광경은 방안 가득 날아다니는 수천 개의 잘린 새끼손가락들. 그중 몇 개의 손가락들이 책을 씨를 사정없이 공격하는데…
<책을 뒤쫓는 소년>(창비 펴냄) 두 번째까지의 줄거리다. 책을 씨는 섭구 씨가 하자는 대로 해야만 할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섭구 씨가 이끄는 대로 책을 향해 끝없는 길을 간다. 그렇게 만나는 책들은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행실>과 <소설 중독자의 일기>, <빛과 어둠의 제국> 등 여섯 권.
이 책들 때문에 둘은 하마터면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시작으로 이유도 모르고 쫓기거나, 신분을 위장해야 하는 등의 위기에 처한다. 만두를 속여 팔고도 도리어 당당한 사람 때문에 황당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평생 공들여 쓴 책을 태우는 사람, 소설이 너무나 좋은 나머지 여러 소설을 마구 섞어 읽으며 자신이 상상한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 읽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모든 책들을 게걸스럽게 모으는 사람, 책을 통치 수단으로 삼는 위정자 등, 미치거나, 지나치게 집착하는 등 오직 책 때문에 평범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책은 이와 같은 인물들과 상황들을 바탕으로 책 관련 기담들과 주변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런데 '새끼손가락만을 잘라가는 마을' 설정은 좀 황당하다고 할까. 판타스틱하다고 할까. 게다가 시대적 배경은 고대다. 때문일까. 첫번째 이야기부터 70~80년대 많은 인기를 끌었던 '전설의 고향(KBS 드라마)'이 떠올랐다.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불 뒤집어쓰고 숨죽이고 가슴 졸이며 보곤 했던, 방송 날짜를 손꼽아 기다라며 보곤 하던 그때 그 기분을 오랜만에 만끽하며 끌려 읽은 책'이란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이런 이 책의 더욱 끌리는 매력은 '끊임없이 생각하며 읽도록 책 곳곳에 수많은 상징들과 메시지들을 심어' 놔서다. 그것도 '우리에게 책은 무엇일까?'와 같은, 아마도 책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끊임없이 생각할 주제로 말이다.
섭구 씨가 말하는 '책을 쓰는 일이란 제국 곳곳을 돌며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책을 온 몸 바쳐 빼내 섭구 씨 팔뚝에 가두는 것'. 섭구 씨의 추궁에 가까운 제의로 밑도 끝도 없는 여행을 한 결과 책을 씨는 섭구 씨가 원했던 모든 책들을 만나게 된다. 또한 할아버지가 잡혀가는 순간까지 그토록 강조했던 "잘 보관된 책은 결코 불타지 않는다"와, "너의 책이 기운을 잃어가고 시들어가는 제국을 구원할 도구"라는 말의 의미도 알게 된다.
자기가 왜 책을 찾아 떠나야 하는지도 다 이해하지 못해 끌려가다시피 했던, 그리하여 첫 번째 책도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만난 책을 씨는 뒤로 갈수록 쉽고 당연하게, 그래서 섭구 씨의 도움 없이도 척척 알아서 해낸다. 책에 그만큼 익숙해진 것이다. 책을 씨의 이런 변화를 보며 처음에 책 한권 제대로 읽지 못했던 어떤 사람이 책과 친해지는 과정을 보는 듯했다.
게다가 책을 씨는 여러모로 아직은 많이 서툰, 그러나 자신의 삶에 어느 정도의 책임도 가져야하는 그런 열일곱 살 청소년이다. 이런 나이 설정은 이 책이 청소년 소설인 이유도 있겠지만,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과 시각이 형성되는 시기이자 성장통 그 정점에 있는 이런 시기에 책의 힘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아닐까?
책을 씨가 첫 번 째로 찾은 책이 하필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행실>인 것은 책읽기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기 위한 그 기본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 삶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다른 부위도 아닌 새끼손가락만을 잘라가는 것 이는 책을 읽자 수많은 다짐과 약속(새끼손가락)을 스스로 하지만 책 한권 변변하게 읽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말하는 것 아닐까?
책에서 무엇을 얻는 것보다 제국의 모든 책을 소유하는 것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이 정작 원했던 책은 물론 모든 책을 잃어버리는 소산 대감의 이야기는 책의 제대로의 역할과 책을 대하는 우리의 가장 바람직한 마음가짐을 말하고자 아닐까? 섭구 씨는 왜 책 읽는 것을 책을 쓰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온 몸으로 책을 써야 한다고 할까?
이처럼 나름 지레짐작, 생각하고, 추측하고 재해석해가며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책 곳곳에 작가가 '책과 책읽기'를 주제로 이야기 속에 심어 놓은 다각적인 상징과 메시지를 나름 생각해가며 읽으면 훨씬 흥미롭고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느끼곤 하는, 퍼즐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가며 큰 그림 하나를 완성해내는 그런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이 책에 대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우리 누구나 책 혹은 책읽기의 중요함과 필요성을 잘 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나 경험을 들며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싶을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구나 그토록 필요하고 중요한 책 읽기를 하는가?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동감할 것이다. '우리에게 책은 무엇인가? 왜 중요한가?'를 언뜻 흥미롭고 가볍기도 한 기담으로 실은 묵직하게 말하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말이다.
책(읽기)의 장점이자 이유 중 하나는 생각하는 힘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오직 할아버지만을 의지해 자라온 책을 씨에게 할아버지의 느닷없는 부재는 삶의 좌표 잃음이다. 혹독한 시련 시작이다. 책을 씨는 이와 같은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까? 책과 연결시킴이 무엇보다 의미 있게 와 닿는다.
<흠영>이라는 일기를 남긴 유만주의 사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음이 분명하다. 유만주는 말 그대로 소설 중독자였다. 과거 시험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소설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자신에게서 일어나기를 바랐다. (…)소설에 대한 혐오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이는 뜻밖에도 이덕무다. 이덕무는 박제가가 앓아누운 이유를 소설에서 찾는다. <서상기>라는 나쁜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덕무가 내린 처방은 이렇다.
"그 책을 불살라 버린 다음에, 다시 나와 같은 사람을 초청해서 매일같이 <논어>를 강독하여야 병이 나을 것이요.(<아정유고>, <청장관전>)"
개혁군주로 평가받는 정조 또한 소설을 혐오했다. 정조는 총애하는 젊은 신하들인 이사황과 김조순이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곧바로 반성문을 쓰도록 조치했으며, 성균관 유생 이옥이 소설적 표현을 즐겨 쓰자 수차례의 경고 끝에 군대에 보내버리기도 했다. 정조의 소설 혐오증은 결국 사상과 문체에 대한 대규모 통제책인 '문체반정'으로 연결되었다.-(154~156)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야기 끝마다 이야기의 힌트가 된 우리 고전들에 대해 쉽게 설명해준다는 것. 그런데 이처럼 설명해주는 고전들은 대체적으로 덜 알려졌으나 우리의 고대 책 문화사에 나름 중요한 책들이라는 것이다. 아홉 편의 이야기와 상관없이 이와 같은 고전 설명만 읽어도 의미 있는 책읽기로 충분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책을 뒤쫓는 소년>(설흔) | 창비 | 2018년 7월ㅣ정가:12,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