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사교육 선생으로 살았다.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해야 했던 스무살 시절 시작한 일이 이리도 오래 지속될 줄 몰랐다. 부실한 공교육과 학력자본의 위력이 조장하는 불안을 터전 삼아 밥벌이를 한 셈이다.
자랑할 일은 전혀 못 되나 그나마 한 때 가르쳤던 아이들이 졸업 후에도 스승의 날이나 명절 안부 인사를 전해오고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들고 올 때면, 그래도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선생이었구나 위안이 든다.
얼마 전에도 제자 한 명이 9월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들고 찾아왔다. 십년 전 만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은 내가 특별한 선생이어서가 아니라 늘 주위 사람들을 먼저 챙기고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그 아이 심성 덕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녀를 제자로 만난 것이 행운이다.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개인 교습을 받아서 대입에 보탬이 된 것보다 내가 그녀를 통해 배운 것과 받은 것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 시절 기억에도 그녀는 남달랐다. 그녀 뿐 아니라 그녀 부모님도 남달랐다. 입시 지옥에서 맹목적으로 불안해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으셨다. 그녀의 부족한 점수보다 장점을 더 크게 보셨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독립적인 마인드를 강하게 심어주셨다.
그녀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대중교퉁 편이 좋지 않았다. 빠듯한 입시 일정에 자가용으로 등교시키는 부모님 모습이 흔한 도시에서 그녀는 30~40분 등굣길을 걸어다녔다. 그녀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침 길 풍경도 보고, 하루 생각도 정리할 겸 걸어서 다니렴. 학교 가는 건 너의 일이지 엄마 일이 아니야. 고3이어도 평소 재활용 분리는 그녀 몫이었고 입시생이라고 명절 때 어른들 찾아뵙는 일도 거르지 않았다. 온가족이 입시 패턴에 맞추어 전전긍긍하는 가정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대학 입학 후 그녀와 가끔씩 만나면서 내 젊은 날과 다른 그녀의 삶이 신기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적극 탐색하고, 두려움 없이 도전해보고, 다시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그녀 모습은 세상 기준에 자신을 짜맞춰 불안에 허덕이는 삶과 대비되어 보였다. 대학 졸업 후 그녀가 마케팅 회사에 다니고 그후 자신의 브랜드로 가방, 옷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동양화 전공과 무관한 일을 어떻게 덜컥 시작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옷 만드는 거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어? 이렇게 묻는 나에게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 처음에 다트선(옷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가슴과 허리 등에 넣는 선)도 몰랐어요. 맨투맨 티셔츠는 다트선 없이도 만들 수 있으니까 그것부터 시작했지요. 봉제 공장 사장님한테 어깨 너머 배우기도 했구요. 한 가지씩 실험하듯 도전해보는 거에요. 가방에서 티셔츠로, 바지로, 이제는 코트까지요.
그녀는 소량 소품목을 작품 만들듯 제작해낸다. 옷장에 오래 두고 입을 수 있는 브랜드를 지향하며 눈길 닿지 않는 곳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그녀만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제품들이다. 그녀와 그녀 지인들이 기꺼이 제품의 모델이 되어주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스토리가 있는 마케팅을 한다. 청년 창업 자금을 지원 받아 오프라인 쇼룸도 오픈했다.
그녀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쇼룸을 둘러보며 나는 재차 물었다. 이 모든 걸 부모님 경제적 지원 없이 했다고? 그녀는 웃는다. 저의 어머니가 좀 독하세요. 제가 직장 그만두고 일 준비할 때 상표 등록비조차 벌어서 하라고 하셨다니까요. 장기간 유럽 여행 갔을 때도 경비 떨어지면 현지에서 그림 그려 조달하라고 하고.... 저의 집에서는 모든 일에 경제적 자립이 원칙이에요.
그녀는 이제 스물 일곱이다. 남들 시선으로 보면 그녀의 쇼룸과 매출이 매력적으로 보이겠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행운처럼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대학시절, 미술 전공과 무관한 글쓰기와 인문학 수업을 수강했고( 그녀는 글도 잘 쓴다. 최근 공동 집필자로 책도 내고 그 인세를 기부하기도 했다), 매주 열리는 전시회를 체크하고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자신만의 메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양화과 졸업 후 집에서 두 시간이나 걸리는 마케팅 회사에서 1년 이상 근무한 것도 현재 모습의 밑그림어었으리라. 그녀의 궤적을 보면 현재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 일을 기반 삼아 삶의 선을 만들어 나간다는 스티븐 잡스의 connecting the dots이 자동 연상된다.
그런 그녀가 이번 주 결혼을 한다. 어머님은 여전하시지? 라는 내 물음에 그녀가 또다시 웃는다. 결혼하면서 부모님이 조금은 경제적으로 도와주실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아니에요. 가전 제품부터 전세 자금 대출까지 제가 남편될 사람과 직접 은행에 가서 서류 작성하고 준비했다니까요.
대신 결혼식은 우리 방식대로 해요. 한복, 양복, 패물, 예단, 이런 거 안 하고 폐백, 신혼 여행도 생략. 그녀도 대단하다 싶지만 그녀 부모님 역시 대단하다. 있으면 조금이라도 보태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일텐데 자식이 온전히 삶의 주제로 서도록 거리를 두고 지켜 보는 것,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을 멋지게 해내신 셈이다.
청첩장을 들고 온 날, 스무살 된 우리 아이도 함께 했다. 그녀가 우리집에 개인 과외를 받으러 왔을 때 열살 꼬마였던 아들이다. 2년 전 음악인의 길을 가겠다며 작곡공부를 하고 있다고 얘기하니 그녀가 함박 웃음으로 멋지다, 대단하다를 연발하며 호기심에 이것저것 묻는다. 우리 아이가 음악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축하와 격려였다.
공부 아닌 음악으로 인생을 살아보겠다 하니 주위에서 우려 섞인 시선으로 염려만 했는데 저렇게 환한 축하의 찬사를 받아본 게 처음이지 싶다. 남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길이 아닌 길에서 즐거움을 맛본 자만이 전해줄 수 있는 축하와 격려가 아니었을지.
참 잘 컸다. 잘 키우셨다. 돌아가는 그녀 뒷모습에 절로 생각이 고인다. 자식 걱정에 늘 노심초사하며 돌부리에 넘어질까, 혹여 깨진 유리를 밟지는 않을까 미리 길을 닦고 치워두는 부모보다 때로는 냉정하게 자식 삶과 거리를 두는 것, 자립의 의지를 심어주는 것,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저마다 삶을 채워나가고 조력자와 응원군으로 관계 맺는 것.
이제 내가 실천해야 할 때다. 문정희 시인이 그랬던가. 모성의 최고 가치는 자식을 품에서 독립시키는 것으로 최종 완성된다고. 지레 거창한 마음 먹고 아이에게 이른다. 누나네 집이 우리 롤 모델이야. 너는 너의 삶을, 엄마는 엄마의 삶을 각자 방식 대로 잘 살아가기........ 각자 도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