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입국한 3만 명의 탈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이다. 하지만 학교, 직장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탈북'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큰 무게이다. 북한이라는 뿌리 없이 이들의 삶을 말할 수 없지만, 이제는 탈북자보다는 한국인 청년으로 불리고 싶은 7인을 만났다. 각 스토리는 <미디어눈> 에디터들이 탈북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기사에 사용된 이름, 나이, 지명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사전에 밝힌다. - 기자말
함흥은 없고 냉면만 남았다
함경남도 바닷가
집은 멀고 고향 잃은 음식이다
...
왠지 섭섭한 음식
함흥은 못 가고 냉면만 먹는다
- 이상국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의 '함흥냉면'에서
냉면의 면은 원래 메밀로 만들지만, 함흥에서는 감자가 많이 나서 감자로 국수를 만들어 먹는다. 고향에서는 감자로 만든 면에 마늘, 고춧가루, 파를 볶아 얹어 먹는 이 음식을 '농마(녹말의 방언) 국수'라고 불렀다. 그 함흥의 농마국수가 한국에는 '함흥냉면'으로 알려졌다. 명절이 되면 진하고 고소한 농마국수의 국물 맛이 그립다. 그래서 이상국 시인의 시처럼 함흥은 못 가고 냉면만 먹는다.
나는 함흥 출신 박혜진(28·가명)이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고생했다. 함흥에서는 음식이 상하지 않게 소금 간을 세게 해서 짜게 먹다보니, 한국 음식이 너무 달게 느껴졌다. 심지어 처음에는 김치도 달아서 못 먹었다. 김치가 달다고 하면 한국 친구들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지만 북한 출신끼리 모이면 다들 공감한다.
한국 음식은 단맛도 그렇지만 자극적인 맛도 매우 강하다. 같이 살던 언니는 한국에 온 지 좀 됐지만, 아직도 라면 스프가 너무 짜고 자극적이라며 면만 따로 삶아 된장을 풀은 물에 넣어 먹는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은 입에 익어갔지만 음식 말고도 적응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혼밥'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다. "왜 혼밥 하고 있냐?"라는 친구의 물음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혼자 먹는 밥'이라는 뜻을 듣고 그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나마 혼밥 같은 줄임말은 몇 번 들으면 유추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영어를 섞어 쓰는 말은 도통 알아듣기 힘들다. 대학생들이 많이 쓰는 '풀강' (Full 강의, 강의와 강의에 사이 쉴 틈 없는 시간표) 같은 모르는 말이 나올 때는 따로 노트에 적어두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렇다 보니 정말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많다. 편의점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던 때에 한 손님이 '커터칼'을 찾아달라고 했다. '칼은 칼인 것 같은데 커터칼이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결국 손님에게 커터칼이 뭐냐고 되물어 봤다. 황당해하던 손님은 두리번거리다 칼을 찾아와서 이게 커터칼이라고 알려줬다.
중국에서 북한에 대한 생각 변해
혼자 탈북해서 이런 크고 작은 난관을 겪으며 적응하고 살아가는 나를 보면 대견하다. 201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북한에서 대학생이었다. 북한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비롯해 3개의 종합대학과 각 도에서 운영하는 공업대학, 사범대학, 의약대학 등의 지방대학들이 있는데 대학에 가려면 한국처럼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
북한 대학은 인문계 대학보다 야간 대학과 이공계 단과대가 더 많다. 계열별로 다르지만 보통 3~7년제로 운영되고 사범대는 4~6년제가 많다. 나는 고향에 있는 사범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탈북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졸업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요즘 젊은 세대를 '밀레니얼 세대'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나처럼 1990년 이후 출생한 2030 청년들을 '장마당 세대'라고 부른다. 내 윗세대들은 사회주의 배급 체제의 혜택을 누리며 장마당에 나가는 걸 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은 우리 세대는 장마당(시장)에 나가 돈을 벌어 먹고사는 문화에 익숙했다. 밥벌이를 위해선 장사가 필수였고, 시장에 가면 과일이나 화장품뿐만 아니라 한국 드라마나 전자 기기 등을 구할 수도 있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한국 화장품과 드라마가 유행이었다. 암암리에 남조선 말투와 패션을 따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이루어져야 했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한국사회를 동경한 것만은 아니다. 평생 북한 사회의 우수성에 대해 가르치는 세뇌 교육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집에서도 부모님들이 북한의 좋은 점만 가르치기 때문에 이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북한)가 제일 좋다는 생각은 흔들리지 않는다.
몰래 들여온 드라마를 보며 남한의 경제 상황이 북한보다 더 낫다는 걸 느끼지만, 우리도 금방 남한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에 가득했다. 학교 선생님, 동네 주민, 부모님, 모두가 함께 믿는 그 진리를 의심할 리 없었고, 김씨 정권은 우리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북한을 떠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해 중국으로 가서 학비를 벌어서 돌아올 계획이었다. 북한에서는 대학교에 다니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하다. 수업 외에도 학교 건물 보수, 실내 장식 등 온갖 비용을 학생들로부터 충당하다 보니 웬만해서는 대학교에 다니기 힘들다. 부모님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이다.
나는 어머니가 5살 때 돌아가시고 새어머니와 재혼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대학에 다니던 시기에 새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지고 학비 문제로 갈등이 생겼다. 2학년까지 마치고 결국 내가 직접 학비를 마련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친한 친구와 중국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는 정말 한국행은 생각지도 않았다. 단순히 중국에서 학비를 벌어서 돌아올 생각이어서 겁이 없었던 것 같다. 처음 탈북 시도 때는 친구와 압록강을 건너는데 군인에게 잡히고 말았다. 군인은 어려서 한 번만 봐주겠다며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혼을 내고는 돌려보냈다. 그리고 용기 내 도전한 두 번째 시도에 친구와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북한에 대한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백화점 앞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정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 너무 깜짝 놀랐다. 북한은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서 큰 건물을 짓지만,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백화점도 물건을 팔지 않는 곳이 많고, 정문을 막아놓고 후문으로 사람들이 다닌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 아닌 사건이지만 처음으로 외부의 시선으로 북한을 바라보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사람들이 쇼핑하는 신기한 광경을 넋을 잃고 보면서 그제야 내가 알던 북한의 진실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 대학과 한국 대학, 가장 큰 차이는 시간표
중국에서 돈만 벌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일이 쉽지 않았다. 합법적인 신분이 아니다 보니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어려웠다. 게다가 함께 탈북한 친구가 북송 당하는 일을 겪으며 위기를 느꼈다.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뇌됐던 북한 체제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중국에서 불안한 신분으로 사는 것이 어려워져 한국행을 선택해야 했다.
탈북한 후 중국에서 체류하고 한국에 오기까지 약 2년이 걸렸다. 한국에 와서는 바로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북한에서도 대학교에 다니다 왔고, 이곳에서도 살 길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 지낸 경험을 살려 중국어과에 진학했다.
학비는 다행히 정부의 도움이 있었다. '북한 이탈 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해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는 고마운 여러 지원책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원 정착 지원인데, 3개월 정도 초기 적응을 위한 교육을 받고 퇴소하면 거주지를 배정받는다. 그 후 거주지 인근에 있는 하나센터라는 곳에서 지역 사회 적응 교육 과정을 한 달 동안 받는다.
그리고 다른 지원 중 하나가 나 같은 대학생을 위한 대학 등록금 지원이다. 국립이냐 사립이냐에 따라 지원 금액이 다르고, 학비에 일부분을 지원받지만, 이 덕분에 학비 부담을 덜고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좋다.
북한 대학과 한국 대학의 가장 큰 차이는 시간표다. 모든 시간과 과목을 학교에서 정해주는 북한 대학교와 달리 여기서는 내가 직접 시간표를 짜야 한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원어민 교수가 수업한다는 것이 매우 신기하고 좋았다.
이처럼 한국 대학 문화의 하나하나가 새로운데 최근에는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며 낯설면서도 신기한 생각이 든다. 북한에서는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북한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아직 강하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아버지와 겸상할 수 없었다. 최근까지도 아버지가 부엌일을 하거나 양말 한 켤레 빠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남자들은 밖에 나가서 일하지만 보통 나라에서 주는 월급은 쌀 1kg의 가치도 되지 않아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면서 몰래 장사를 병행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인지 북한과 비교하면 여성 인권이 진보한 한국에서 여성 운동을 하는 것이 신기하다.
탈북민,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나를 부르는 말이 하도 많아
그래서 아직 한국은 신기하고 낯설고 어려운 사회다. 어느 가게에서 쌀을 싸게 팔고, 내 또래 청년들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직접 몸으로 부딪치지 않고는 알 길이 없다. 처음엔 아르바이트 구하는 법도 몰라서 쩔쩔맸다. 겨우 찾아낸 편의점 구인광고를 보고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지원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이력서 학력 칸에 북한에서 나왔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써넣었던 기억이 난다.
사장님은 내 이력서를 보고 황당해서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셨다. 채용은 됐지만, 시간이 갈수록 함께 일을 한 다른 한국 청년과 나를 대하는 사장님의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내 국적은 한국이지만, 탈북자라는 꼬리표는 없어지기 힘들다는 걸 절감했다. 결국 일을 그만두기로 했고, 그 이후로 더는 이력서에 북한에서의 학력을 기재하지 않는다.
탈북민,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등 나를 부르는 말이 하도 많아 나도 머리가 복잡하다. 왜 이렇게 구분해서 불러야 할까? 도통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은연중에 못사는 사람,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탈북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사람이 많았다. 다른 청년들처럼 내일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 뿐인데 말이다.
항상 탈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다 보니 미래에 대한 고민이 크다. 전공을 살려서 외무 영사직 공무원에 도전하고 싶었는데 북한 출신은 못 할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다. 주변의 우려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도 없다. 그럴 바에는 그냥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으려고 한다. 과연 여기서 다른 청년들과 경쟁하며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일까?
뉴스 기사에 '청년 실업'이란 말이 자주 거론되는 걸 보면, 탈북자가 아닌 다른 청년들에게도 일자리 문제가 걱정인 것 같다. 그럴수록 서른 가까이 되어 대학을 졸업하는 탈북 여성에게는 취업 문이 더 좁게 느껴진다. 같은 조건이라면 탈북자라는 점이 혹시나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까? 그냥 고향이 조금 멀 뿐인데. 언젠가는 어딜 가서도 편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함흥에서 왔고요, 한국 사람이에요."
덧붙이는 글 | 취재 ·글 : 윤형 에디터, 삽화 : 김하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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