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기간 중인 지난 9월 18일, 김정은 노동당위원장 부부가 문재인 대통령 부부에게 풍산개 암수 한 쌍을 선물하기로 약속했다. 이 '커플'이 검역 절차를 걸쳐 지난 9월 27일 판문점으로 입경했다. 북한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방북한 2000년 정상회담 때도 풍산개를 선물한 적 있다.
함경남도 풍산군 출신인 이 개는 북한에서 천연기념물 제368호로 지정돼 있을 뿐 아니라 항일투쟁과 관련해서도 명성을 갖고 있다. 일본 군견들과의 '한일전'에서 이긴 적이 있다. '북한의 명물 풍산개'란 글의 일부다.
"북한에서는 일본이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러 군견들을 끌고 풍산 일대를 누빌 때 풍산개들이 달려들어 군견들을 물어 죽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2006년에 북한연구소가 발행한 <북한>에 실린 글.
전범기 깃발 아래 조선을 누비던 일본 군견들을 풍산개들이 물어 죽였던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대첩'을 거뒀다고 할 만도 했을 것이다.
풍산개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사냥을 잘하기 때문에, 북쪽 지방 사냥꾼들이 예로부터 좋아했다고 한다. "풍산개는 오랜 옛날부터 사냥꾼들의 사냥길에 동행하여 벗했으며, 짐승을 잡는 데 큰 공을 세우는 등 충견으로 알려져 있다"며 "남쪽 지방의 사냥꾼들도 이 개를 한 마리 구하기 위해 멀리 북쪽 지방까지 찾아가기도 했다"고 1993년에 발행된 <북한>지는 말한다.
투쟁력뿐 아니라 품종 면에서도 우수하다고 한다. "성질이 온순하고 주인에게 잘 순응하며 사냥할 때는 사납고 적수에게는 용맹스럽다"면서 "경계심이 강하고 영리하며 집을 잘 지킨다"고 위의 2006년 기사는 말한다. 남쪽에 진돗개가 있다면 북쪽에 풍산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정도로 풍산개 선물은 대단한 일이다.
옛날에는 국가 간의 동물 선물이 훨씬 빈번했다. 사신단 방문을 이용해 국가원수들끼리 동물을 예물로 교환하는 일이 많았다. 동물에 대한 관심은 지금처럼 높은 데 반해 외국산 동물을 가까이 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국가원수 간의 선물로 동물이 각광을 받았다.
이런 선물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사례도 적지 않다. 13세기 후반에 동아시아를 여행한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 그런 사례를 기록해두었다.
당시 베트남에는 참파 왕국이 있었다. 몽골군의 침략을 받은 참파가 전쟁을 중단시킬 목적으로 정기적인 코끼리 선물을 약속하자, 몽골 정부는 이를 수락했다. 코끼리를 매개로 양국이 종전의 단서를 열었던 것이다. 참파의 코끼리 선물은 조공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조공에 대한 답례로 몽골의 답례인 회사(回賜)가 있었겠지만, <동방견문록>에는 기록돼 있지 않다.
신라-당나라의 종전선언에 역할한 개와 앵무새
몽골족은 말을 타고 유라시아를 평정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무서워했던 동물이 있다. 바로 코끼리다.
<동방견문록>에는 몽골 기병대가 미얀마 군대와 전투할 때 벌어진 특이한 광경이 소개돼 있다. 양쪽 부대가 근접하자, 몽골 말들이 화들짝 놀라며 도주했다. 미얀마 군대가 끌고 온 코끼리를 보고 그랬던 것이다. 결국 몽골군은 말에서 내린 뒤 화살 공격으로 코끼리들을 몰아냈다.
이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코끼리에 대해 남다른 느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참파가 코끼리를 선물했으니, 몽골인들한테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선물로 보내진 동물이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한 사례는 우리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신라는 나당동맹을 이용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직후인 670년부터 당나라와의 나당전쟁에 돌입했다. 이때 생긴 적대관계는 63년 뒤인 733년에 가서야 해소됐다. 63년간의 적대관계 끝에 신라와 최강국 당나라 사이의 '종전선언'이 이루어진 셈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이때 신라 성덕왕은 개 세 마리가 포함된 예물을 보냈고, 당나라 현종은 흰색 앵무새 한 쌍이 포함된 예물을 보냈다. 이 기회에 양국 간에는 무역도 이루어졌다. 개와 앵무새가 63년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7세기판 종전선언을 도출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송나라(남송) 학자 채침은 고대 중국 역사서 <서경>을 풀이한 <서경집전>에서, 큰 개가 주인의 뜻에 따라 정적을 죽인 사례를 거론하면서 "개는 사람의 마음을 알므로 부릴만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원전 12세기에 주나라 무왕이 외국 임금한테서 큰 개를 선물 받은 사례를 소개할 때 나온 말이다. 이처럼 인간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개를 상대방 군주한테 선물하는 것은, 신하 못지않은 또 다른 수하를 선물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너무 많이 먹어대고 사람까지 죽인 코끼리는 '유배행'
동물 선물이 화근이 된 일도 있었다. 942년에 태조 왕건이 거란에서 선물로 보낸 낙타 50필을 만부교란 다리에 묶어두고 굶겨 죽인 사건은 유명하다(만부교 사건). 왕건이 그렇게 한 데는 명분이 있었다. 926년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으므로 동족에 해를 끼친 외세와는 손을 잡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그런 방식으로 천명했던 것이다.
동물 예물이 상대방 나라를 곤란케 한 일도 있었다. 음력으로 조선 태종 11년 2월 22일자(양력 1411년 3월 16일자) <태종실록>에 소개된 코끼리 선물이 그랬다. 일왕(이른바 천황)을 누르고 실권을 행사했던 무로마치막부 제4대 쇼군(장군님 개념)인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태종 이방원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태종은 이 선물을 사복시란 관청에 맡겼다. 사복시는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 미국대사관 뒤편에 있었다. 말과 수레를 관장하는 곳이었다. 코끼리를 맡은 그곳 관원들은 얼마 안 있어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너무 많이 먹어댔기 때문이다. 하루에 콩을 네댓 말이나 먹어 치웠다. 거기다가 몸 밖으로 배출하는 양도 너무 많았다. 사복시 마당이 더러워질 정도였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을 때려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어전회의에 상정됐고, 태종은 지방으로 추방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사실상의 유배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위 <태종실록>에 따르면, 추방 명령을 내리면서 태종이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사람도 아닌 동물한테 귀양 명령을 내리자니 좀 어색했을 것이다. 만약 쇼군이 보낸 선물이 아니라면,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국가 간의 선물이므로 이런 절차를 거쳤던 것이다. 고민 없이 버린 게 아니라는 점을 일본인들한테 드러내려 했을 수도 있다.
코끼리의 유배지는 전라도 순천 앞바다의 장도에서 전라도 육지로, 다시 충청도로 옮겨졌다. 이러는 사이, 임금이 태종에서 세종으로 바뀌었다. 세종은 "너무 많이 먹어댑니다"라는 불평이 끊임없이 올라오자, 결국 "벌판에 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좋게 말하면 귀양을 풀어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숙식을 더는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 뒤 코끼리는 방랑자 신세가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이처럼 동물 선물이 문제를 일으킨 사례도 있지만, 이런 선물은 상대국의 분위기를 우호적으로 바꾸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일반 선물은 왕족이나 귀족의 수중에 들어가면 끝이지만, 동물 예물은 일반 백성들한테까지 알려질 가능성이 높았다. 선물로 받은 동물을 관리하는 것은 일반 관원이나 노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물 선물은 왕족·귀족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한테까지 화친 및 평화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대에는 외국 동물을 구경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런 선물이 더 귀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대 군주들은 동물 선물을 국제관계에 적절히 활용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