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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4월 24일 서울 상암동 CJ E&M 사옥 앞에서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씨와 시민단체 대표들이 CJ E&M의사과와 재발방지 대책 수립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연 모습.
 지난해 4월 24일 서울 상암동 CJ E&M 사옥 앞에서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씨와 시민단체 대표들이 CJ E&M의사과와 재발방지 대책 수립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연 모습.
ⓒ 김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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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가을, 스물여덟 청년 이한빛이 죽었다. 이한빛은 tvN의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 PD였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조연출이었던 그는 의상·소품·식사 등 촬영 준비, 데이터 딜리버리, 촬영장 정리, 정산, 편집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55일 동안 단 이틀밖에 쉬지 못했을 정도로 드라마 촬영 현장의 노동시간은 길고 노동강도는 높았다. 혼술남녀 제작팀은 작품의 완성도가 낮다는 이유로 첫 방송 직전에 계약직 노동자 다수를 정리해고했는데, 그 과정에서 계약해지와 계약금 환수 임무를 맡은 사람이 이한빛 PD였다.

인턴 월급의 절반을 세월호와 KTX 여승무원 투쟁 등의 후원금으로 쓸 만큼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그가 계약직 해고 업무를 맡으면서 느꼈을 혼란과 좌절감, 무수한 착취와 멸시가 가득한 드라마 현장이 주는 무기력감, 부당한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때 돌아오는 것은 모욕과 인사 불이익뿐인 절망감 속에서 신입사원 이한빛 PD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사람들을 위로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던 재기발랄한 청년 이한빛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팠어요.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 이한빛  PD 유서 중에서

 
 
그의 유서에는 아주 오랜 시간 당연하게 여겨왔던 방송제작환경의 문제점들이 남겨져 있었다. 20시간이 넘는 초장시간 노동, 위험하기 짝이 없는 촬영 현장, 폭언과 모욕이 떠나지 않는 군대식의 위계적인 상하 관계, 다층적인 하청 관계...

이한빛 PD의 죽음이 알려지자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했고,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다. 나약한 개인의 죽음으로 몰아가며 책임을 회피하던 CJ E&M도 공식 사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약속했다.

2년이 흘렀다. 이한빛 PD의 죽음은 두껍고 단단한 방송산업의 문제들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고, 현장 노동자들이 조금씩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내게 했다. 오랜 시간 당연하게 여겨졌던 방송 현장의 노동인권, 노동조건 개선의 문제들이 이제 수면 위에 올라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가 떠난 뒤... 방송계 노동문제는 수면 위로

방송 현장 스태프들의 뜻이 모여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출범했고, 언론노조는 지상파 4사와의 산별협약을 통해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물꼬를 열기도 했다. 이한빛 PD의 유지를 받들고자 설립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도 방송계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가는 흐름에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10월 26일은 이한빛 PD의 기일이다. 이한빛 PD를 잊지 않고 그의 뜻을 잇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 단체·노동조합이 2주기 추모문화제를 준비하고 있다. 2주기 추모문화제는 방송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악한 방송 현장의 문제들을 알려내는 자리로 만들고자 한다.

특히 20시간 넘는 초장시간 노동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방해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쪽대본'으로 진행하는 촬영은 생방송을 방불케 해 몇 날 며칠 밤샘은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23시간 촬영 후 졸음운전, 찜질방에서 2-3시간 취침, 폭염·혹한 속에서도 멈추지 못하는 촬영.

문제 제기를 하면 "방송 펑크 낼 거야?" "여긴 원래 그래"라는 답변이 돌아올 뿐 몇십 년 동안 바뀌지 않았고, 그래서 드라마를 만드는 수많은 젊은이들은 "얘기해 봤자 소용없어"라며 체념해왔다. 이한빛 PD의 죽음은 그러한 전근대적인 악습과 관행들을 부수는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이한빛 PD 2주기 추모제에서는 "잠 좀 자고 일하자"고 외치며 우리의 삶을 바꿀 노동시간 단축 요구안으로 '12ON 12OFF(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자)'를 선포하고자 한다.

이번 주 상암동 일대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만난 시민들 중에는 법정근로시간이 1일 8시간인데 12시간 노동이 요구안이라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었다. 그만큼 드라마 현장의 노동시간은 비상식적이며, 비인간적이다. 8시간은 자고, 잠깐 개인적인 일도 보려면 최소 12시간 휴식은 보장되어야 한다.

인간이라면, 12시간 휴식은 인권이다
 
 이한빛PD 2주기 추모 문화제
 이한빛PD 2주기 추모 문화제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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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ON 12OFF은 드라마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기준이다. 잠을 안 재우고 촬영하는 지옥 같은 노동을 거부한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며, 방송계 초장시간 노동을 근절하기 위한 상징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12ON 12OFF가 현장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방송사·제작사가 다각도의 방안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며, 이번 추모문화제에서 실질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싸워나갈 것을 결의할 것이다.

한류를 선도하는 문화콘텐츠를 만들어온 방송산업이 누군가의 삶에 작은 위로와 빛이 되었다면, 그것을 만들어 온 노동자들도 행복해야 한다. 방송을 하고 싶어서,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서 꿈과 열정을 갖고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은 청춘들이 더 이상 좌절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이제라도 바뀌어야 한다.

언젠가 4월, 이한빛 PD가 어머니의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며 "엄마, 기억하기 위한 작은 의식이예요. 우린 연대해야 하고요"라고 했다 한다. 불편해하지 마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이제 우리가 이한빛 PD를 기억해야 한다. 이한빛 PD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던 방송노동환경의 문제들을 하나하나씩 풀어가기 위한 작은 걸음에 함께 해 주시기를. 방송 현장의 이한빛들이 10월 26일 저녁 CJ 앞을 가득 메워, 우리의 요구가 더 멀리 퍼져 나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한빛PD#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한빛 2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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