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유엔 세계 고아의 날'을 처음 제안하고 이의 제정을 위해 활동해온 윤기(75) 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 다음은 지난 23일 윤 명예회장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
[관련 기사] "한국에도 없는 고아의날, 왜 유엔이 만들어야 하냐고요?"
유엔본부 있는 뉴욕서 청원대회... "함께할 우군 만났다"
- 뉴욕에는 언제 다녀오셨나요.
"지난 11일 가서 일주일만인 17일에 돌아왔어요. 공생원 아이들 19명과 공생복지재단 직원, 그리고 세계 고아의 날 추진위원 등 한국에서 50명이 같이 갔습니다. 일본에서도 행사를 돕는 정계인사와 사회단체 관계자, 추진위원 등 40명이 갔으니까 모두 90명이 동행했습니다."
- 가셔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이번 뉴욕 방문에서는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세계 고아의 날 제정을 위한 청원대회가 가장 큰 행사였어요. 마침 공생원 90주년(10월 31일)과 유엔인권선언 70주년(12월 10일)을 앞두고 있어서 더 큰 의미가 있었죠. 청원대회는 15일 뉴욕의 재팬소사이어티에서 열렸는데요, 한국과 일본에서 온 사람도 많았지만 유엔 관계자와 여러나라의 복지단체 사람들이 많이 참가해서 성황을 이뤘습니다."
- 행사는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우선 공생원 90주년 기념하는 뜻에서 원생들로 구성된 수선화 합창단의 노래가 있었고요. 이어서 열린 국제포럼에서는 오준 전 유엔한국대사가 공생원 90년의 역사를 돌아보고 세계 고아의 날 청원의 의의에 대한 강연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참석한 헤더윅 음타바 재영말라위고등판무관은 아프리카 말라위 고아들의 비참한 현실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후쿠이 테루 일본 중의원 의원은 유엔 쓰나미의날 제정의 경험에 비추어 세계 고아의 날 제정의 당위성을 주장했습니다. 마지막 청원대회에서는 세계 고아의 날 청원 결의문을 채택하고 행사를 마무리했죠."
- 함께 간 공생원 아이들도 좋은 구경 많이 했겠네요.
"그렇죠. 청원대회장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이후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뉴욕자연사박물관도 구경했어요. 9.11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제로에 가서도 추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모두들 행복해 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 이번 방문에서 어떤 성과가 있었다고 보십니까.
"어떤 성과라기보다는 유엔에 세계 고아의 날 제정을 청원하기 위한 운동의 일종의 교통정리가 됐다고 봐요. 현지에서 우릴 도와줄 수 있는 우군들을 많이 만났죠. 특히 우리처럼 세계 고아의날을 제정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스타재단 관계자들을 만나 향후 공동연구 등 3개항의 합의를 한 게 가장 큰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스타재단은 어떤 재단인가요.
"순전히 세계 고아의 날을 만들자는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재단입니다. 이 재단의 이사장인 셰릴 로베슨 피고트씨는 부친이 실업인이어서 여행을 많이 했는데 세상에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재단을 만들어 고아들을 돕기로 했다고 해요. 카레이서, 가수 등 유명인사들을 섭외해서 방송을 통해 호소하고 후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번에 우리랑은 상호교류(정보공유), 공동연구, 공동제안 등 세 가지에 합의했어요. 곧 한국에도 방문하겠다고 했습니다. 아주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인구 100만 일본 사카이시에 '인권국'이 설치된 이유
- 세계 고아의 날을 제정하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가요.
"유엔이 정하는 기념일은 기본적으로 민간단체가 아니라 유엔 회원국가가 청원을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회원국 과반수가 찬성해야 제정되는 것이죠."
- 그럼 유엔에 앞서 먼저 우리나라 정부를 상대로 청원을 해야 하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다음달에 정부에 청원서를 낼 겁니다. 그럼 정부가 접수해서 심사를 하겠죠. 저희는 다만 정부가 유엔에 제안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큰 NGO 단체들도 있지만 고아문제만큼은 우리가 역사와 경험이 있으니까 우리가 주도하는 겁니다. 다행히 월드비전이나 어린이재단 같은 큰 단체가 처음부터 찬동하고 돕기로 했습니다. 다수의 저명한 학자분들도 힘이 돼주기로 했으니 다 잘 되지 않을까 합니다."
- 잘하면 정부가 내년에라도 유엔에 제청할 수 있겠군요.
"우리로서는 이제 정부가 나설 때라고 부탁할 뿐이지, 나머지는 정부가 하기 나름이겠죠."
- 세계 고아의 날이 제정되면 뭐가 달라질까요.
"아무래도 고아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유엔에 129개 기념일이 있는데, 각 날마다 다 의미가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무관심이 적'이라고 한 만큼 우리 사회의 약자인 고아들에 대한 관심을 갖자는 것이죠. 세상이 풍요로워지다 보니 우리 사회에 아직도 고아가 있나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 세계에 고아가 1억5300만 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 그런 선언적인 의미만 있는 건가요.
"세계 고아의 날 제정이 반드시 무슨 재정적인 도움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가령, 우리는 고아들의 자립을 위해 직업훈련원을 많이 짓자고 주장하고 있는데, 세계 고아의 날이 통과되면 당장 한국과 일본 정부에서도 손놓고 그냥 있지는 못할 겁니다."
- 한국과 일본에는 고아의 날이 있나요.
"아직 없습니다."
- 한국이나 일본에도 아직 없다면서 UN에 먼저 만들어달라는 건 앞뒤가 바뀐 게 아닌가요.
"저는 거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사해보니 이미 세계 50여 개 국가가 고아의 날이나 주간을 운영해 고아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나 어떻습니까. 세계의 고아는 오히려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어려운 시대를 겪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고아는 이렇게 돌봐야 한다, 그들을 돌보는 선생은 어떻게 양성해야 한다는 매뉴얼과 노하우를 이미 축적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노하우를 당장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나라의 고아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UN에서 기념일을 만들어 고아의날을 만드는 게 시급하다는 생각입니다."
- 하긴 유엔에서 세계 고아의 날을 먼저 만들면 각 나라가 따로 만들 필요가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고향의집 1호가 세워져 있는 인구 100만 정도의 일본 사카이시에 '인권국'이라는 부서가 있는데, 이것은 세계 인권의 날이 제정됐기 때문에 설치된 기구입니다. 유엔의 기념일로 제정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현재로서 세계 고아의 날 제정에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현재로선 특별한 장애물이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배우 안성기씨는 '유엔의 100여 개가 넘는 날 중에서 고아의 날이 없다니, 처음 듣는다'고 놀라워 하더군요. 문 대통령도 이 얘길 들으면 '이렇게 중요한 날이 없었다니'라고 하지 않겠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 그런데 세계 고아의 날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50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목포 시민들이 시민장을 치러주셨는데, 시민들이 그러시는 거예요. 어머니가 평생 고아들을 보살피다 돌아가셨으니 아들인 너는 그 사업을 이어받아 고아가 없는 미래를 만들어보라고, 그리고 아예 세계 고아의 날을 만들어보라고.
그러나 당시 아무 힘도 없는 26살짜리가 원장을 맡고 보니까 당장 매일 버려지는 아이들을 먹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게 급하니 그런 건 엄두도 못낸 거죠. 이후 일본에 와서 일하다 보니 그 당시 사람들의 말이 의미가 있었던 겁니다. 주변의 이런저런 사람들한테 조언을 듣다 보니 6년 전인 2012년부터 구체화가 됐습니다."
- 세계 고아의 날을 왜 본인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태어난 것도 고아원이고 자란 것도 고아원입니다. 집사람을 만난 것도 고아원이고 결혼식도 고아원에서 했죠. 고아가 아닌 데도 말입니다. 나만큼 고아하고 인연이 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건 하나님이 이 일을 나한테 하라고 한 겁니다. 어떤 학식이 깊은 학자라도 나같은 체험을 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손해나 이익과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노인홈이 '한일친선-남북화해의 장' 된 이야기
- 이제 화제를 재일동포 노인홈(양로원)인 고향의집으로 바꿔볼까요. 현재 고향의집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돌보고 있나요.
"고향의집은 일본 내 5곳에 있는데 도쿄 148명, 교토 160명, 고베 90명, 사카이 90명 등 평소 여기에 들어와서 생활하는 사람은 거의 500명 정도 되는 거죠. 그 외 데이서비스(주간보호센터)나 헬퍼서비스 등을 받으러 들르는 사람들도 많아요. 오사카에도 고향의집이 있지만 숙소는 없고 주간보호센터만 있습니다."
- 처음 목표가 다섯 곳에 고향의집을 짓는 것이었습니까.
"처음에는 재일동포가 주로 사는 일본 내 10개 도시 정도에 만들려고 했어요. 그러려면 앞으로 요코하마, 나고야, 히로시마, 후쿠오카, 치바 정도에 더 지어야겠죠. 그런데 지금은 시설의 규모나 숫자보다는 정말 필요한 곳에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어요. 지금까지처럼 큰 시설보다는 작은 시설이 한 30개 정도 더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홋카이도나 센다이같은 지방도시에도 재일동포 고령자들이 많거든요."
- 그런 시설을 만들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1982년도에 일본에 건너왔는데, 한 교포신문에 실린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어요. 죽은 지 13일이나 지난 재일동포 노인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거예요. 머나먼 타국땅에서 수십 년간 차별 속에서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은 거 아닙니까.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과거 식민지 시절 일본에 건너온 동포들이 이제는 다른 일본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령화시대를 맞게 된 거 아닙니까. 노인이 되면 누구나 고독해집니다. 그런 노인 동포들을 덜 고독하게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 노인홈을 생각하게 된 거죠."
- 노인홈이라면 일본에도 많이 있고, 한국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지 않나요.
"일본 사람이 100명 있는 노인홈에 한국 사람 혼자 들어갔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굳이 차별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안에 있으면 일본 사람들 흉내도 내야 하고, 일본 말을 해야 하고, 음식도 노래도 일본 것을 따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은 일본의 한 시골에 홍수가 났다고 해서 먼 친척 되는 사람을 위문하러 갔더니, 이 분이 치매끼가 확실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시청에 전화해서 '이 분은 좀 시에서 보호해줘야겠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그분이 내가 떠날 때 배웅하러 나와서는 '오랜만에 친척이 와서 반갑다고 생각했는데 그대가 날 양로원에 데려가라고 전화했냐, 서운하다'고 따지더라고요.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끼리 살아야지 일본 사람 시설에 들어가면 숨통이 막힌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많구나 느낀 거죠."
- 그럼 고향의집에서는 한국 사람들끼리만 생활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또 하나의 차별 아닙니까. 역차별. 일본 사람들도 본인이 원하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한국인 전용이라면 아마 일본 정부에서 허가해주지 않았을 겁니다."
- 그래요? 저는 한국인 전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절반 이상이 일본인들입니다.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고베나 교토는 70%가 한국인이고, 여기 도쿄는 거꾸로 70%가 일본인입니다."
- 그럼 일반 노인홈과 고향의집은 어떻게 다릅니까.
"일반 노인홈은 일본인들만 있지만 여긴 한국 직원도 있고, 한국 노래도, 한국 음식도 있다는 게 다른 겁니다. 가령 식사에 김치와 우메보시(매실장아찌)가 같이 나오죠. 간단한 것 같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복지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문 열었을 때 <아리랑> 노래를 틀었더니 휠체어에 앉았던 동포 할머니가 갑자기 일어서 춤을 추려고 하더라고요. 그건 <아리랑>이라는 문화의 힘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문화 복지가 필요한 겁니다.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필요하지만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 일본 정부는 어떤 지원을 해주고 있나요.
"다른 일본 노인홈과 똑같습니다. 재정면이나 시설면이나."
- 일본인 직원도 많겠네요.
"많은 정도가 아니라 4/5가 일본인입니다."
- 고향의집 직원들 명함을 뒷면을 보면 '이 나라에 사는 외국인이 일본은 좋은 나라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쓰여 있더군요. 무슨 의미입니까.
"프랑스에서 일본식 철판구이집을 갔는데, 오사카 출신 일본인 주방장에게 '일본에는 자주 가냐, 안 돌아갈거냐'고 물으니까 '여기가 좋아 평생 살 것'이라며 프랑스 자랑을 막 하더라고요. 프랑스 사람이 프랑스 자랑을 하면 별로일 텐데, 일본 사람이 프랑스 자랑을 하니까 좋아보이더군요. 일본이라는 나라가 재일동포 등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많다고 하는데, 차별하지 말라고 대놓고 말하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돌려 얘기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그래서 일본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뜻이 있는 일본 사람은 그걸 보고 '일본 사회가 정말 이렇게 좋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문화 공생시대에 당연히 그렇게 되야 하지 않나요. 여기 들어온 어떤 한국인 노인이 젊어서 얼마나 차별을 받았던지 '내가 힘이 생기면 꼭 일본에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일본인 젊은 직원이 몸을 깨끗이 닦아주는 등 잘해줘서 그런 마음이 없어지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겁니다."
- 그럼 여기 들어와 있는 한국 노인들과 일본 노인들은 서로 잘 지냅니까.
"처음 고향의집을 만들 때 서로 싸우면 어쩌나 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가 '노인들이 그럴 만한 힘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웃음) 조총련하고 민단하고도 싸우면 어쩌냐고 하더군요.
한번은 조총련 출신 할아버지가 들어왔는데 민단에서 위문을 온 거예요. 그 안에 젊었을 때 엄청 싸웠던 사람이 있는 걸 보고 '저 놈이 오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 나도 저 놈도 이제 나이가 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싸움할 기력이 없어지더라는 겁니다. 고향의집 안에서 통일이 된 거죠. 허허."
- 고향의집이 한일 친선을 위한 장도 되고 통일의 장이 되기도 하는군요.
"그렇다니까요. 여기는 한일 친선이나 통일이 말이 아니라 생활인 곳입니다."
"내 국적이 일본인이라고? 어떻게 살아갈까 막막했었다"
- 1982년에 일본에 건너 왔다고 들었습니다. 부모님 때부터 그토록 공을 들였고 정든 공생원을 떠나 왜 일본으로 오는 결심을 했나요.
"한국에 시집온 집사람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아이들 돌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응대하는 일이 너무 피곤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신이 한국에 와서 10년 살아줬으니까 이번엔 내가 일본 가서 10년 살아줄란다고 했죠.
또 나 때문에 역시 일본 국적이라서 서울의 일본인학교를 다니던 딸이 하루는 '아빠, 일본의 우체통은 어떻게 생겼어?' 그러더라고요. 딸까지 나처럼 일본도 모르는 일본 사람으로 키워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일본말도 모르는데 일본에 간다는 게 쉽지는 않았죠. 하지만 일본에 가도 나만의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결심했습니다."
- 본인의 국적이 일본이라는 것은 언제 알았나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전혀 모르다가 대학에 합격한 뒤 호적등본을 제출하려고 했을 때 어머니께 '니 호적은 여기 없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어요. 일본에 있다는 거예요. 즉, 내가 일본인이라는 거죠. 일제 때 어머니의 친정 쪽에서 한국 사람과의 결혼을 반대하자, 아버지가 처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당연히 한국 사람으로 알고 자랐는데, 갑자기 일본 사람이 됐으니 너무 놀랐겠네요.
"물론입니다. 일본 사람을 싫어하는 한국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까, 친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낙심해서 공생원 앞 바닷가에 와서 앉아 있는데, 공생원 형이 와서 '나를 봐라. 나는 호적도 국적도 없지 않냐. 나는 너희 아버지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하긴 그 형은 부모에게 버려져서 고아원에서 컸으니 호적 자체가 없을 거 아닙니까. 나는 일본에라도 있지. 나보다 더 고민이 많은 사람이 그런 말이 해주니 결정적으로 굉장히 위로가 되더군요."
-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도쿄에서 고향의집이 설립되기까지는 엄청난 고난이 있었군요. 그냥 한국에서 공생원이나 잘할 걸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던가요.
"너무 힘들 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젊어서 타국에 건너와 수 없는 차별 속에서 고생하다가 이제 나이가 들어 갈 곳 없게 된 동포 고령자들을 보고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일부 성공한 사람들이 무슨 동포 양로원이 필요하냐는 얘길 하곤 했지만 그건 자기가 잘 사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나 모든 재일동포들이 잘 사는 건 아니었어요. 어려운 사람들이 오히려 훨씬 많았죠. 제가 일본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도쿄에서 목포향우회를 했는데,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나중에 들어온 한 노인에게 '전당포에서 양복 빌려입고 고향 다녀왔다면서?'라고 손가락질하는 소릴 들었어요.
그분이 오죽하면 양복까지 빌려 입고 갔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이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랑 우리나라의 문화 속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엔 참 막막했었는데 그래도 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을 보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