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알쓸신잡3' 편에서 독일을 여행했다. 당연히 독일의 현대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소개되었다. 가스 열차를 만들어 약 600만 명을 학살한 주범인 아이히만은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다 결국 법정에 서게 된다.
악의 화신으로만 여겼던 그의 실체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그리고 말한다. 그저 정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이에 김영하 작가는 '아이히만은 악마도 아니었고 어떤 명분이나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나치가 악인이라면 그에게 죄를 묻고 다른 독일인들은 죄가 없다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지만 실체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평범했고 그 평범한 악을 막아내지 못한 독일인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이제는 누구나 받아들이는 이야기지만 쉬운 것은 아니다. 이를 이야기로 풀어내어 함께 고민하게 하는 책이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이다.
열여섯 소년 미하엘과 서른여섯 한나는 우연히 만나 격정적 사랑에 빠진다. 서로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막 성에 눈뜬 젊은 남자와 살면서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했을 것 같은 성숙한 여자는 자신을 온 몸으로 안아주는 서로에게 금세 빠져든다.
둘의 사랑은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누워 있기라는 의식을 거친다. 내가 책을 읽으면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야기에 푹 빠진다. 봄에 시작된 두 사람의 사랑은 그 해 가을, 끝나지만 그녀와의 사랑은 남자의 평생을 지배한다.
몇 년 뒤 남자는 법정에서 그녀를 만난다. 남자는 나치 관련 재판을 주제로 삼은 세미나의 학생이고 한나는 피고인 중 한 명이다. 작은 수용소에 배치된 그녀는 아우슈비츠에서 매달 보내져오는 60명의 수감자들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그만큼을 선별하여 '죽음의 아우슈비츠'로 되돌려 보내는 일을 했다. 또 수감자들을 이송하던 중 그들이 갇힌 교회가 폭격에 불 탈 때 문을 열어주지 않아 모두를 죽게 만든 감시원 중 하나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한나는 몹시 바른 모습으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며 분위기를 파악한다. 그녀가 의지하는 것은 보고 듣는 것뿐이다. 모든 것이 문서로 정리되고 전달되는 법정에서, 교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그날 밤을 기록하여 출판한 책이 증거인 상황에서 그녀는 무엇도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문맹이었다.
그녀의 약점을 알고 세심히 살펴본 그녀의 삶은 지독히도 팍팍했다. 지도를 볼 줄 모르고, 메뉴판을 볼 줄 모르고, 편지를 읽을 줄 모르는 그녀는 얼마나 무지하고 답답했을까.
자신이 살고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 사랑하는 이의 편지를 읽지 못해 느끼는 절망감, 그 불안으로 쉽게 마음 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여자, 그녀가 자신을 원하는 열여섯 아이에게 쉽게 마음을 열었던 건 그녀의 팍팍한 삶 때문이었으리라.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법대 교수이자 판사를 지낸 독일 작가이다. 작가는 법조인으로서 부끄러운 자국의 역사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나치를 경험한 부모 세대와 청산의 과정에 서 있는 자신의 세대가 함께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한 듯하다.
옮긴이(김재혁)의 말처럼 '남녀 간의 사랑과 나치의 시대사,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자리 잡은 인간의 자존심과 약점의 문제'를 다룬 이 소설은 해결되지 않은 역사를 흥미로운 로맨스와 적절히 엮어내어 많은 독자를 확보함으로써 쉽게 단정 짓고 판단할 수 없는 나치 전범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게 만든다. 작가는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유죄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또 천태만상의 강제수용소 감시원들과 앞잡이들에 대한 유죄판결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확실했다. 그들을 이용했거나, 그들의 행위를 막지 못했거나, 1945년 이후 그들을 추방할 수 있었을 때 적어도 추방하지 못한 세대가 법정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탐사와 진상 규명이라는 명목 아래 이 세대에게 수치라는 판결을 내렸다. -p.99
그렇다면 나치 전범에 대한 처벌이 철저하고 끝끝내 이루어진다면 역사 청산은 끝나는 것일까? 작가는 말한다. 자신의 세대 역시 범행을 저지르고, 수수방관하고, 외면하고, 묵인하고, 수용한 우리의 부모를 사랑하기에 이 잘못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범죄자인 한나를 사랑하기에 자신 역시 유죄라고 여기는 미하엘처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재판에 참석한 나는 거리를 두고 그들의 반응을 관찰할 수 있었다. 나의 그런 태도는 마치 한 달 한 달 죽지 않고 살아남아 강제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져가면서 새로 오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무심하게 기록하는 수감자와 같았다. 나는 살인과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느낄 법한 마비 상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마비 상태 속에서 삶의 기능은 최대한도로 축소되고,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자비해지며 가스를 살포하고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p.110
작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였다고 말하는 듯하다. 재판이 몇 주 동안 계속되자 화자는 감각이 마비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런 증세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타남을 느낀다. 처음에는 흥분과 당혹함으로 눈물 흘리던 판사와 참심원들도 시간이 갈수록 평상심을 되찾고 미소를 머금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는 것이다. 그들의 악행을 합리화할 수도 없고 나치 전범에 대한 단죄가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들을 모조리 개개인의 잘못으로 떠넘기고 이루어지는 처벌에 내포된 문제와 모순 또한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 사무직으로의 승진이 보장된 상황에서도 번번이 도망쳤던 그녀는 이번에도 끝내 사람들을 불타게 한 주모자가 자기였노라고 고백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지라도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끝내 밝히고 싶지 않은 한나의 심리는 무엇일까? 작가는 왜 한나의 약점을 문맹으로 설정했을까?
수감된 지 18년 만에 한나는 사면이 되는데 바로 전날 그녀는 자살을 한다. 그녀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세상으로 돌아가기 불안한 심리도 있었겠지만 수감 중 글을 배우고 강제 수용소에 관한 책들을 읽음으로써 문맹과 무지로 인해 외면했던 자신의 죄를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전범의 단죄가 여러 문제를 안고 있더라도 전후 70년까지도 친위대 대원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독일을 보면, 친일파 청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의 현실에 씁쓸한 마음이 앞선다.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겐 언제쯤 생겨날까.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극복해 나가려는 그 용기가 지금의 독일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1995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2014년에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한다. 유사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과오를 극복하려는 그들의 힘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