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들은 재판 과정에서 심각한 2차 피해를 당한다. <오마이뉴스>는 어렵게 피해자들을 만나 그 실상을 들을 수 있었다. 수사·재판과정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2차 피해와 이를 막을 대안을 세 편에 걸쳐 다룬다. 이 기사는 그 두번째로, 피해자들이 용기를 낸 이후 벌어진 각종 부적절한 사례들이다.[편집자말] |
"콘돔을 끼고 강간했다는데 그 시간에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던 거 아냐?"
A씨는 강간죄로 한 남성을 신고했고,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관은 A씨에게 남성이 콘돔을 착용하는 시간에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고 질책했다. A씨는 "남성이 손을 꽉 눌러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작게 대답했다. 경찰관은 재차 "힘으로 눌러서 나갈 수 없었다는 뜻이냐"라고 물었다. A씨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 사례 중 하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2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 10명 중 7명이 자살을 생각한다. 어렵게 입을 열어도 수사와 재판에서 법조인이 가진 통념에 따라 끊임 없이 '피해자다움'을 증명해야 하고, 부주의 속에서 개인 정보가 유포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2차 피해는 범죄피해 이후 피해자가 겪는 2차적인 고통과 불이익을 말한다. 보통 피해자의 직장 등 커뮤니티 안에서, 사법기관에서, 그리고 가해자와 그의 변호인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례들이 많다.
피해자 10명 중 7명이 불이익으로 회사 떠나
한 집단에 속한 피해자가 성범죄 피해사실에 관해 입을 여는 건 특히 어려운 일이다. 집단 속에 존재하는 위계, 고용불안 등 현실적인 문제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실제 피해를 고백한 피해자 상당수가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다는 조사도 있다.
지난해 7월, 서울여성노동자회가 발표한 '직장 내 성희롱이 피해자 심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과 성희롱 문제 제기로 인한 불이익 조치 경험 실태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7명이 불이익과 집단 내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회사를 떠났다.
종교단체나 학교에서 피해자에 관한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는 빠르지만, 이를 막을 방법도 마땅치 않다.
B씨는 2011년 아프리카로 떠난 선교 봉사에서 천주교 신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그는 미투 운동이 번진 뒤 당시 신부가 문을 잠그고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고백했지만, 다른 신부는 "가해자가 지난 7년간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용서받지 못했다"라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B씨는 휴대폰을 바꿔 가해 신부와 접촉한 사실이 없었고, 뒤늦게 정의구현사제단도 이 부분을 정정했지만 이미 퍼져나간 소문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었다.
지난 3월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제보가 빗발쳤을 때, 해당 교수는 다른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피해자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2차 피해를 가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가 인터뷰 한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의 경우, 피해자의 정보가 커뮤니티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 심각한 2차 피해를 겪었다(관련기사 :
'성령'이라는 이재록을 위해, 그들은 나를 두 번 죽였다). 심지어 교회 신도인 법원 직원까지 나서 피해자 정보를 유출하기도 했다(관련기사 :
성폭력 피해자 실명 유출, 알고 보니 법원직원 소행)
피해자에게 "피고인이 예쁜 학생들만 만졌냐" 물은 검사
그렇다면 피해자의 말을 듣고 판단할 수사기관과 법원은 안전한 걸까.
C씨는 상습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였다. 일부를 제외하고 피해 유형이 비슷해 경찰 조사 단계에서 바로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형사는 바로 "강간이 아니라는 거네"라고 말했다. 그는 상담소에서 "아예 형사가 시나리오를 다 쓴다, 그래서 일일이 날짜에 맞춰서 사건 내용을 진술했다"라며 "옷을 어떻게 벗겼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먼저 벗었다는 거네?'라고 해서 갑갑했다"고 토로했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일도 벌어진다. D씨는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채로 강간을 당해 상대 남성을 고소했지만, 경찰에서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여자가 술 마시고 모텔에 따라간 이유가 뭐냐"라는 식으로 말해 상처를 받았다.
법정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발생한다. 한 검사는 증인으로 출석한 청소년 피해자에게 "피해자 외에 피해가 발생한 다른 친구들은 외모가 예뻤나, (피고인이) 주로 외모가 예쁜 학생들만 만졌나"라고 물었다.
특히 가해자 쪽 변호인의 신문은 도를 넘는 경우가 많다. 의뢰인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의도를 넘어 지나치게 '숫처녀'를 언급하며 피해자에게 모욕감을 주고, "피해자가 오히려 피고인이 옷을 벗기는 데 도와줬다"라는 식의 질문을 서슴없이 던진다.
전국 법원에 성폭력전담재판부 150개가 운영(2018년 2월 기준)되고 있지만, 재판부 언행이 문제가 된 경우도 많다.
서울서부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2016년 8월, "개인적으로 여성이 술을 마시고, 성관계를 맺는 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성 경험이 있는 여성과 없는 여성은 성폭력 대응 방식에 차이가 있다" 등 사건 본질과 무관한 발언을 했다. 법조인이 가진 '성 감수성'이나 인지 정도에 따라 복불복으로 재판이 흘러가는 것이다.
최근 국정감사를 통해 성폭력 전담 재판부의 문제 발언을 공개한 백혜련 의원은 "성폭력 전담 재판부의 민낯"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소속 판사 중 신청한 자에 한해 1년에 한 번 1박 2일 과정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것 외에 사법부의 노력이 전무하다"라며 "전문성 제고를 위한 내실 있는 교육과 재판과정을 점검할 수 있는 모니터링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비판했다.
"기껏 실명 가렸더니 변호사가 이름 언급해"
신분 노출을 막기 위한 피해자들의 노력이 무산되는 경우도 많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발표한 '성폭력 재판 과정에서의 피해자 권리에 대한 모니터링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6년 8월까지 조사한 사례 334건 중 피해자 신상 노출 사례는 30차례에 달했다. 증인으로 나오는 피해자의 이름을 가리고, 비공개로 재판을 진행해도 이후 판사나 검사, 변호사의 실수로 실명이 언급되는 등의 경우다.
한 검사는 아동성범죄 사건에서 피해 아동들의 이름을 모두 'ㅇㅇㅇ'으로 가명 처리했지만, 법정에서 판사가 실명을 불러 당황했다고 한다. 그 검사는 전문가와의 면담에서 "해당 아이 엄마로부터 '우리 아이 이름을 저렇게 부르면 어떡하냐, 판사에게 다음부터 조심해달라고 해달라'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특히 상대 측 변호인으로 인한 피해가 심하다. 이재록 만민중앙교회 목사를 고소한 피해자들 또한 법정에서 이 목사의 변호인이 실명을 거론하면서 SNS 글에 실명이 올라갔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우리가 실명을 놔두고 가명을 쓴 이유도, 비공개 재판을 요구한 이유도 피해자 보호 때문이었는데 그게 완전히 무산되니 허무했다"라며 "법조인이면 기본적인 개념과 도덕이라는 게 있을 줄 알았다, 화가 나고 억울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상대 쪽 변호인이 피해자 정보를 흘려도 징계를 받거나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없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4조에 따르면 피해자 신원과 사생활 비밀 누설을 금지하는 대상은 '성폭력 범죄의 수사 또는 재판을 담당하거나 이에 관여하는 공무원 또는 그 직에 있었던 사람'으로 한정한다.
피해자 전담 국선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신진희 변호사는 "상대 변호인 인격에 달려 있다, 법정에서 나온 이야기를 밖에 전달해도 훈시규정만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라며 "고의적인 의도든, 부주의였든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 미치는 피해는 매우 크다"라고 설명했다.
상대 쪽에서 사건 기록을 열람·등사(복사 및 촬영)할 때 간혹 피해자 이름이나 전화번호가 유출되는 경우도 있다. 변호인이 빼낸 피해자 정보를 가해자에게 전달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강압적으로 합의를 요구한 사례다.
신 변호사는 "그나마 요즘엔 아동이나 청소년 사건에서는 검사, 판사, 변호인도 다 조심하지만, 일반 성인 사건 특히 준강간 혐의처럼 다툼이 큰 경우에는 2차 피해가 아직도 심각한 상태"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