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급 법원을 대표하는 판사들이 격론 끝에 사법농단 연루 판사들의 탄핵 필요성을 인정한 가운데, 같은 날 검찰 조사를 받은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는 박근혜 정부와 법원행정처가 재판 진행 방향을 논의하고, 특정한 판결을 요구하는 등 중대한 헌법위반 행위를 저질렀다고 입을 모았다. 당초 이날 회의에서는 법관 인사제도 등 사법행정 현안을 다룰 예정이었지만, 지난 12일 안동지원 소속 판사 6명이 '재판개입 법관 탄핵 촉구 결의안'을 논의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회의의 결이 달라졌다.
법원 내부에서 판사 탄핵소추 결의안을 논의·가결한 초유의 사태인 만큼 찬반 토론도 치열했다. 이날 세 시간 가까이 격론을 벌인 끝에 법관대표 105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과반수인 53명이 찬성했다. 반대표는 43명, 기권은 9명이었다.
송승용 법관대표회의 공보판사(수원지법 부장판사)는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진정성을 보여줘야 하고, 탄핵소추 절차를 촉구하지 않는 게 법관회의의 중요한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라는 찬성 의견이 나왔다"라며 "탄핵 소추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정치적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게 옳지 않다는 반대의견도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회의 뒤 김명수 대법원장은 말을 아꼈다고 한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오후 6시 30분부터 약 1시간 30분 동안 법관대표회의가 열린 사법연수원에서 법관대표 80여 명과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 대법원장은 "법관대표회의가 사법행정에 협력하면서 대법원장을 견제하는 역할을 잘 수행한 것 같다, 올해 법원 외적 문제를 논의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면 내년에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재판을 할 수 있을지 재판제도 개선과 관련해 지혜를 모아주길 바란다"라는 말을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탄핵소추안에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내년부터는 사태가 정리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법관대표회의 의결 내용은 전자문서 형태로 20일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박병대 "기억 안 나, 기억나는 것도 정당한 지시"
반면, 같은 날 대법관 출신 중 처음으로 검찰의 포토라인에 선 박병대 전 대법관은 대부분 혐의를 부인했다. 이날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1시 46분까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피의자 조사를 받은 그는 "국민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나", "사법농단 최종 지시자는 본인인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인가" 등을 묻는 취재진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검찰청사를 빠져나왔다.
검찰에 따르면, 박 전 대법관은 '일부는 정당한 지시였고, 일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그는 검찰 조사를 받기 전에도 "법관으로 평생 봉직하는 동안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법원행정처장으로 있는 동안에도 사심 없이 일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검찰은 박 전 대법관이 2014년 2월부터 2016년 2월까지 법원행정처장으로 근무하면서 박근혜 정부의 관심 재판 개입, 내부 목소리 탄압, 판사 비위 덮기, 공보관실 운영비 운용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고 보고 있다. 특히 2014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삼청동 회동'에 참석해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 등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민사소송을 두고 교감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조만간 박 전 대법관을 다시 소환해 추가 조사를 진행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