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수요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7시. 부산 NC 백화점(해운대 좌동) 앞 네거리 모퉁이로는 서로 낯이 익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름하여 '해운대 촛불'을 함께 해 온 해운대 동네의 사람들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의 날로부터 4년 8개월, 1702일째인 그날, 이들은 '해운대 촛불'을 접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세월호의 사람들, 단원고의 아이들이 배와 함께 서서히 바다로 가라앉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생생하게 목격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날 이후 무언가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었다.
그 중심에 섰던 몇몇 사람을 그날 '마지막 촛불' 문화제가 시작되기 전 해운대 '바보주막'에서 만나 부산겨레하나 공동대표로서 해운대 지회장이기도 한 지은주씨의 말부터 들어봤다.
"4.16 그날 저녁 '부산겨레하나'(사단법인 우리겨레하나되기부산시민운동본부) 회원들이 모였어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너무 이상하지 않아? 정말 이럴 수가 있는 거야? 다들 그랬어요. 다음날은 부산참교육학부모회와 전교조 부산지부가 부산역에서 촛불 집회를 한다고 해서 거기로 달려갔어요. 무슨 정보라도 얻을까 해서요. 왜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게 내버려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으니까요."
바로 그날 부산겨레하나 회원인 수정이 엄마 김미희씨는 "우리도 해운대에서 촛불을 들자"고 제안했고, 그 자리에 모인 다른 회원 엄마들과 전교조 교사들은 대번에 한마음이 되었다고 했다.
'매일 저녁 7시, 해운대 좌동 NC 백화점 앞에서 촛불을 들자. 한 사람이 나오든 두 사람이 나오든.'
'해운대 촛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언제까지 해야 할까? 누군가 묻자 나온 대답이 이랬단다.
"최소한 3년은 해야지요.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3년상을 치렀잖습니까? 나는 그 마음으로 할 겁니다." (교사 이상균)
"나는 끝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실이 밝혀지고 책임자 처벌이 될 때까지." (교사 손정옥)
"촛불이라도 들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어요"
문화제 형식의 해운대 촛불은 4.16 보름 후인 5월 2일 처음 타올랐다. 해운대 사람들은 그로부터 200일을 매일 촛불을 들었다. 그 후 2년간은 월, 수, 금으로 줄여서 민주당, 정의당 등 정당, 시민단체, 전교조 등이 돌아가며 촛불을 이어갔고 매주 수요일 한 번으로 된 것은 근래의 일이었다고 했다.
1702일 동안이나 '해운대 촛불'을 밝혀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촛불이라도 들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요." (지은주 씨)
과연 그랬다. 그는 참사가 나고 두어 달 동안은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우울증도 왔다. 주위에서는 너 미쳤느냐고 걱정도 했다 한다.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냥 있을 수가 없는 거 아닌가요?"
지난 8월 정년퇴임 축하연을 하는 자리에서 지인들이 '촛불 소녀'라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던 교사 손정옥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지요. 생각할수록 너무 고맙지요."
1702일을 함께 했던 고마운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
그 고마운 사람들을 여기에 일일이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몇몇이라도 떠올려 보자. 문화제를 가능케 했던 가수, 성악가, 시인, 작가, '산하 밴드'를 비롯한 연주자들. 그리고 해운대 지역 전교조 선생님들과 함께 나온 중고등학생들, 엄마들의 손을 잡고 나온 어린이들.
"열 명 쯤 되는 어린아이들이 초를 담당했어요. 참석자들에게 초를 나누어 주고 끝나면 그것을 다시 거둔다든가, 길바닥에 떨어진 촛농을 제거하는 청소까지…"
이렇게 말하는 지은주씨의 두 어린 남매도 '촛불의 아이들' 일원이었다. 2014년 초등 2학년, 일곱 살 배기였던 누나 수정이와 동생 재영이는 이제 6학년, 4학년이 되었다.
손정옥 선생과 지은주씨가 입을 모아 말하는 '고마운 사람들' 안에는 촛불 문화제에 필요한 경비에 써라며 보내온 크고 작은 후원금의 주인공인 후원자들을 빼 놓을 수 없다. 여유가 되는 지인에겐 좀 많이 내놔라 윽박(!)지르기도 했다며 손 선생은 웃었다. "그러면 다들 두 말 없이 내 놓았지요." 돈이 모자라 힘든 적은 없었다고 했다.
"처음엔 스크린, 앰프, 마이크, 빔 등을 빌려오느라 무척 힘이 들었는데, 나중엔 후원금으로 그걸 구입할 수 있었지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노신사가 촛불 앞을 지나가다 멈춰서는 저고리와 바지 주머니를 다 털어서 돈을 내놨는데, 자그마치 25만 원이 되었다. 그런 다음 그 노신사가 곁에 있는 친구인 듯한 동행자에게 "자네는 이런 거 할 줄 모르지?" 하자 그 동행자도 1만 원을 내 놓았다고 했다.
"한번은요, 한 여고생이 노란 리본을 사 가면서 제 친구에게 '봐라. 우리 동네는 지금도 촛불을 들고 있잖아.' 자랑스레 얘기하는 거예요. 그 한 마디가 감동이었어요. 얼마나 가슴이 뿌듯하던지." (손정옥 선생)
그는 3년상을 결심했던 이상균 교사에겐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라고도 했다. 마지막 1년은 그와 둘이서 해운대 촛불을 지킨 거나 다름없었는데, 시작할 땐 집이 해운대였던 이 선생은 먼 금정구로 이사를 한 뒤에도 해운대 촛불에 빠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4.16 이후 1년 간 말없이 점심 단식을 했던 이상래 고교 교사도 해운대 촛불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 가톨릭 신자인 그는 지금까지도 거의 매일을 세월호 아이들을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언제까지 세월호 노란 배지를 달고 다니실 건데요?" 아이들이 물을 때면 그는 대답한다고 한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내 기억에서 사라지는 날이 오면 그럴 지도 모른단다."
1702일 동안, 고마운 사람, 즐거운 일만 있었을 리는 없다.
"찬바람 맞으며 서 있어야 하는 겨울나기가 힘들었어요." (손정옥 선생)
그런데 박근혜 정권 치하 자체가 겨울 한파였다. 모든 것이 힘들었다. 4.16 관련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걸기도 쉽지 않았다. 거리나 학교 주변에 걸어 놓은 플래카드를 누군가 찢어 놓고 가기도 하고 "세월호 유가족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을 하나요?" 의아해하는 사람들부터 "당신들 돈 받고 이러는 거지?" 막무가내 시비를 걸거나 욕을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또한 촛불의 사람들 중에서는 높은 곳에 플래카드를 걸다가 떨어져 몇 달을 고생한 이도 있었고, 이런저런 일로 경찰서를 들락날락 해야 했던 이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마음으로 그 모든 고난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걸까? 지은주씨는 말했다.
"우리의 촛불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유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랬기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해운대 촛불'의 사람들은 한마음, 한가족일 수밖에 없었다. 예은이 아빠, 지성이 아빠, 주연이 엄마가 부산으로 왔을 때였다. 해운대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레움 게스트 하우스란 곳에 숙소를 잡아 두었는데, 그곳은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 지은주씨는 좀 걱정이 되었다고 했다. 바다, 우리 아이들을 집어삼킨 바다가 아닌가.
"그런데 주연이 엄마가 다음날 그러더군요. 주연이는 바다를 좋아해 부산을 참 오고 싶어 했었다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밤새 주연이를 생각했다고..."
특조위 활동 지지부진 하면 '해운대 촛불'은 다시 타오를 것
해운대 촛불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만 요구해 온 게 아니다. 박근혜 정권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국면에서는 정권이 그것을 포기할 때까지 그것과 싸웠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 사건 때는 그것을 이슈로 촛불을 들었다. 국정농단 박근혜 퇴진 운동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때는 두 달 정도 그것에만 집중했다고 했다.
해운대 촛불 마지막 날인 그날은 공교롭게도 4.16 세월호 진상규명을 포함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키로 공표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오늘 세월호 유가족 지성이 아버지에게 '해운대 촛불'을 이제 내린다고 전화를 했더니 이제 시작인데, 하시며 아쉬워하더군요. 당연하죠. 저도 마음이 많이 그렇습니다. 박근혜를 무너뜨린 건 바로 세월호 촛불이었다고 생각해요. 해운대 촛불을 통해 저는 마을의 소중함, 마을 사람들과의 연대의 힘이 얼마나 큰가도 깨달았어요. 제게 4.16은 촛불 행동을 더 하느냐 않느냐 이전에 우리 가슴에 깊이 박혀있는 무엇입니다. 우리가 다 봤잖아요. 그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요. 제대로 진상 규명이 되지 않고서는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은주씨의 말에 손정옥 선생은 금방 화답을 했다.
"새로운 특조위가 지지부진하면 해운대 촛불은 다시 타오를 수밖에 없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