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못했지만 나만의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불안하지만 계속 나아가는 X세대 중년 아재의 좌충우돌 일상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이제 새해 계획을 세워야 할 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원하지만 건강이 없다면 부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 또한 잘 알기에 우리는 새해가 되면 연례행사처럼 헬스클럽 연간 이용권을 결제한다. 3개월 치 가격으로 1년 권을 결제하면 왠지 돈을 번 느낌이 든다. 하지만 꽃피는 봄이 오기 전에 연간 회원권을 끓은 것을 후회하고, 집안에 사다 놓은 운동기구는 옷걸이 신세로 전락한다.
새해에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바로 걷기다.
우리는 걷기를 통해 얻게 되는 정신적·육체적 장점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밤을 새워 일을 하거나 심지어 신나게 놀고 난 다음 날에도 끄덕없던 청춘은 이미 지나갔다. 살아갈 체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걷기를 꼭 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늘 하나다. 건강에 좋은 걸 알지만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크지도 않은 집에서 신발을 신기 위해 현관까지 나가는 거리가 마라톤 풀코스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진다.
하루에 5천 보 걷기도 힘든 직장인에게 '하루에 3만 보를 걷는다'는 배우 하정우의 이야기는 - 의지의 문제를 넘어 -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걷기를 통해 얻게 되는 선물의 가치를 알게 되면 먼 나라가 아닌 이웃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는 X세대인지라 과외와 학원수업이 없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학교 운동장과 골목길을 누볐다. 천성이 활동적인 성격이라 등산도 좋아했고, 아내도 산에서 만났다. 뛰는 것과 걷는 것은 나에게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달리는 일은 월드컵 주기의 행사가 됐고, 걷는 일도 점점 줄어들게 됐다. 그래도 체력 하나는 아직 자신 있다는 허황된 생각은 마흔이 넘어가면서 철저하게 깨졌다.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었다. 100세 시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복근까지는 아니어도 건강하게 살기 위한 생존 체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10km 마라톤에 성공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동경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회사 생활이나 여행이나,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전 세계를 돌며 글을 쓰고 달리는 하루키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부러웠다. 내일 아침 하루키와 보스턴 강변을 달릴 수는 없지만 혼자서 동네 공원이라도 달려 보기로 했다.
한 달이 지난 후, 회사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하고 덜컥 10km 마라톤 대회를 신청했다. 대회까지는 50일 정도 시간이 있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일주일에 3회 정도 집 앞 공원에서 달렸다. 충분히 연습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회 당일이 되니 긴장됐다. 누가 보면 곧 몬주익 언덕을 오를 사람처럼 비장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회 당일 아침까지 아내의 신신당부가 이어졌다. 우리 둘은 한날한시에 죽어야 한다며,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아내의 귀여운 협박(?)이 달리는 내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주입식 교육의 학습효과 때문인지 겁이 나기도 했다. 현장에서 출발과 동시에 100m 달리기를 시연한 청년이 1km 지점에서 탈진한 모습도 보았다.
그래서, 나는 노련하게 8km 지점까지 차분히 페이스를 지켰고, 8km 지점을 넘어서고도 심장이 더 뛸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역시 진정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구나. 그동안 연습한 효과가 있었어!' 이런 허황된 생각으로 속도를 높였으나 허벅지 통증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세상엔 쉬운 일이 없구나.'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한 채 1시간 2분의 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아직 내가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이후 10km 코스를 2번 더 달렸다.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조만간 풀코스에 도전 하겠다느니, 달려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둥 가소로운 헛소리를 주위에 떠벌리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예상대로 나는 달리기 홍보대사의 자리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내가 마라톤 풀코스 도전을 포기하자 아내는 내심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달리기 대신 걷기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런 나의 빠른 태세 전환이 애처로운가? 그래도 황금보다 귀하다는 건강을 위한 일이니 이해해 주기 바란다. 나는 가능하면 주어진 삶 안에서 건강하게 살고 싶다.
회사 생활 중에 할 수 있는 좀 더 현실적인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생활 속에서 걷기를 실천하기로 했다. 우선 튀지 않는 검은 색깔의 저렴한 운동화를 구입했다. 미세먼지와 폭우가 있는 날이 아니면 도보 15분 거리의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출근했다. 지하철역 계단은 무조건 걸어서 오른다. 이대역이나 성남의 산성역 정도의 등산 급 계단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오른다.
걷기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회사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걸을 수 있다. 학생들도 50분 수업에 10분 휴식이 보장된다. 빨리 죽고 싶다면 하루 종일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라는 한 의사의 말을 들었다. 회사에서 점심 먹기 전까지 최소 한 번은 3층부터 18층까지 걸어 올라간다. 점심에는 주 2~3회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러 나간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부장이 고르는 메뉴 말고 다른 음식이 먹고 싶은 날도 있다. 하지만 이를 거절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한 마땅한 핑계도 없다.
이럴 때 걷기가 도움이 된다. 운동을 핑계로 고독하지만 고즈넉한 점심을 즐긴 후,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도 가질 수 있다. 퇴근하기 전, 18층까지 한 번 더 오르거나 여유가 있는 날은 15분 정도 사무실 주변을 걷는다. 퇴근 후에도 마을버스 대신에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회사에 다니면서 하루에 만 보는 넉넉히 채우게 된다.
만 보가 조금 부족하다고 느끼는 날에도 나는 걱정이 없다. 집에는 나보다 체력이 좋은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자주 걷는다. 스마트폰과 TV에 빼앗긴 부부의 대화 시간을 걸으면서 채운다. 건강도 챙기고 부부 사이도 돈독해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맞볼 수 있다. 걸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걷다 보면 자연스러운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우리 부부는 비가 오는 날이면 북한산의 우이령 길을 자주 찾는다. 한정된 인원을 대상으로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기에 붐비지 않아서 더욱 좋다. 우리는 제주도에서도 렌터카 없이 걷는다. 차로 보는 제주와 걸으면서 보는 제주는 완전히 다르다. 배우 하정우가 하와이에서 하루 10만 보 걷기에 도전했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와이만큼이나 아름다운 제주를 걸으면 강력 성분의 천연 소화제를 먹는 격이다. 따라서 놓치고 싶지 않은 제주의 맛집들을 하루 네 차례도 갈 수 있다.
나는 가끔 혼자서 집 근처 호수공원을 걷기도 한다. 홀로 걷다 보면 글쓰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책상에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잘 떠오른다. 생산성과 효율성의 차이가 비교 불가이다.
걷기가 주는 즐거움을 아는 나는 그룹 god가 순례자의 길을 걷는 TV 프로그램을 보며 신나는 상상을 해봤다. 35년 지기 친구들과 순례자의 길을 걷는 내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때 아내가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순례자의 길 나랑 걸을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나는 아무래도 순례자의 길을 두 번 가야 할 운명인 것 같다. 아내와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하고, 두 발로 걸을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하다.
새해에는 셸 위 워크(Shall we w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