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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 중국과학자가 유전자 편집을 한 쌍둥이를 태어나게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최근 한 중국과학자가 유전자 편집을 한 쌍둥이를 태어나게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 pixabay
최근 한 중국과학자가 유전자 편집을 한 쌍둥이를 태어나게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충격이다. 인간배아 연구를 당분간 중단하자는 과학계의 제안이 있었다지만, 실상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면 예상됐던 결과일 것이다.

중국과학자 허젠쿠이 남방과학기술대학 교수가 그 당사자인데, 그는 지난달 25일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유전 공학 기법으로 에이즈 저항성을 지니는 쌍둥이를 탄생시켰다고 유튜브 영상을 통해 발표했다.

조작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지만, 과학계가 야단법석 난 건 당연하다. 헉슬리의 <신세계>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디스토피아적 인류 생산이 떠올랐다면 비약일까. 하지만 인간의 고유함을 외부의 힘으로 변형, 조작해 흠결 없는 인간으로 탄생시킨다는 것이 책이나 영화가 아닌 실재라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게 과한 일만은 아니다.

허젠쿠이 교수의 유전자 변이 실험의 발로는, 어쩌면 그의 주장대로 지극히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과 탐구심 혹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결과마저도 순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자. 존중받아 마땅한 한 과학자의 개인적 동기로 눙치기엔 인류에 미칠 파장과 영향이 너무 지대한 것 아닐까.

허젠쿠이 교수의 실험이 전적으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판단은 과연 선한 것일까. 질병으로부터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면, 질병 없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을까. 기적이 아닌 한, 매우 건강한 몸을 타고난다 하더라도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이런 저런 질병으로 시난고난하다. 그 시난고난함에 대한 연민이 의학의 진보에 기여했음은 부정할 이유가 없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아플 때마다 약물, 수술 등의 의학적 개입을 허락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학에 철저히 기댄다 해도 반드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만도 아니다. 의학이 생명을 연장할 뿐 그 질까지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은, 그저 연명 수준에 머물고 있는 사례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장애와 질병을 비정상으로 간주한 사회

질병이 찾아올 때 그 경중에 따라 대처하는 양상도 다를 것이다. 중한 고통이 오면 이 고통이 어디에서 왔나를 추적하게 된다. 개인적인 원인에 기인한 경우, 때로 그 원인이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고통에 대한 사회 역학적 고찰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사회적 요구로 옮아가면서, 고통이 개인적 책임의 영역만이 아니라는 사회적 공감을 불러내기도 한다.

너무 내달리기만 한 인생이라면 멈추고 숨 고르기를, 혹은 너무 안 쓴 게 탈이라면 잘 써볼 요량을 하게도 된다. 이렇듯 고통은 아예 말살함으로써 내 몸이 달려온 흔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함께 다시 하기를 기약한다. 크거나 작은 질병이 몸을 관통하는 과정은 그래서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생로병사'는 인간의 한계이자 정체성이 아닐까?

재난이나 전쟁의 포화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내버려 두라는 것이냐는 힐난이나, 자연요법을 설파하는 것이냐는 다그침은 그만두자. 그런 얘기가 아니다. 기실 사는 것이 고통의 연속이 아니던가. 고통으로 인해 슬픔에 젖어보지 않는다면 인간은 대체 무슨 도구로 타인의 고통을 엿볼 수 있을까.

그것이 유전에 기인했든, 질병에 기인했든, 가난이나 사회적 환경에 기인했든, 고통이 파생시키는 극단의 치열한 감정들은 인간을 변화하게도 만든다. 유전자 기술에 힘입어 장애나 질병이 전혀 없는 무균실 속의 신세계를 상상해보자. 유토피아일까. 유전정보를 변형 조작해 질병, 장애에서 인간을 구제한다는 발상, 사회가 질병이나 장애를 지금껏 '비정상'으로 간주해왔던 오래된 부정의한 역사 속에 점철되어 있다.

물론 큰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채 사는 것이, 특히 한국처럼 보건, 장애복지가 열악한 나라의 경우,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그들의 투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장애인들이 수년을 거리에서 투쟁하며 요구하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비장애인이 있는가. 어디든 갈 수 있는 비장애인은 움직일 권리, '이동권'을 단 한 번도 권리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당연히 누리는 것을 누군가는 투쟁으로 획득해야 하는 권리라고 생각하기란, 실은 이토록 어렵다. 비장애인의 범주에서 논해온 인권 담론은, 장애를 고유함으로 인정하지 않고 '정상'의 범주로 편입시키려고 하면서 장애를 소외시켜 왔다.

'나쁜 유전자'를 잘라버리는 건 오히려 간단하다

유전자 가위로 에이즈 유전자를 잘라내 출생을 조작하는 일 말고도 에이즈에 대처할 방법이 전무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 역학적 고찰은 질병의 원인을 찾아 해결할 책임을 오로지 개인에게만 떠넘기지 못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를 소환해 그 해결에 책임을 지운다. 그래서 매우 어렵다. 허젠쿠이 교수처럼 가위로 나쁜 유전자를 제거해 새 생명을 출생시키는 일은 어쩌면 가장 간단한 방식일지 모른다. 문제가 되는 유전자를 사전에 없애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에이즈는 제대로 된 병리학적 접근에 실패해 병에 대한 오해와 동성애 혐오라는 괴물을 낳았다. 뿐만 아니라 백신을 개발하고도 비싼 값에 약을 팔려는 제약사들의 탐욕에 극빈국 환자들에겐 그 혜택이 돌아가지도 않았다. 질병에 대처했던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인류의 고통의 원인이 질병에 있었는지, 이후 질병에 접근하는 인류의 태도에 있었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 없을 것이다.

21세기인 지금도 날로 강해지는 전염병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세균 역시 함께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유전 공학이 신의 위치로 등극해 인류를 디자인하는 세상이 온다고 해도 질병 없는 세상은 올 수 없다. 허니 질병을 제거, 격리시키며 악의 감옥에 가두지 말고, '질병과 공존하는 삶'이라는 전망에 기대는 것이 오히려 구원이지 않을까. 능동적 신체로 질병을 수용 변이 시키면서 말이다.

누구나 건강한 아기를 원한다. 하지만 자녀를 키우는 생물학적 부모이든 사회적 부모이든, 이들에게 물어보라. 장애나 질병이 있는 자녀를 흠결 없는 자녀로 대체하길 원하는지, 혹은 돌아간다면 흠결 없는 탄생을 원하는지. 어떤 대답이 나올까. 그렇다는 대답이 우세하다면 이것은 의학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실패이다. 우리 사회가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이들을 '이등 국민'으로 치부한 참담한 실패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할 부모가 훨씬 많다고 확신한다.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그 인간의 흠결 없음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유전자 가위 기법#유전공학#크리스퍼 유전자가위#맞춤아기#허젠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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