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만 해도 사업가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우리 부모세대 대부분은 내 자녀의 결혼 상대가 사업가보다 대기업에 다니길 원했다. 사업이라는 게 대박을 기대하지만, 그 이면에는 쪽박을 찰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인식이 좀 나아졌다지만 현실에서 체감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아이를 키우는 30대 중후반 친구들을 보더라도 '내 자녀는 창업보다 대기업에 취업했으면 좋겠다'라고 털어놓는다. 한 친구는 "국내에서 창업 후 5년 동안 살아남는 기업은 고작 4곳 중 1곳뿐이라는데 그럴 바엔 대기업 가는 편이 낫다"라면서 사뭇 명확한 근거까지 제시했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기업 생명 행정통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최근 몇 해 동안 창업기업의 5년 내 생존율이 27% 안팎에 머무는 수준이다.
성공한 스타트업을 많이 낳은 나라, 미국은 어떨까. 실패율이 70% 이상으로 결코 낮지 않다. 우리와 비교해 큰 차이도 없다. 다만 명확히 다른 것이 있다. 실패를 대하는 태도다. 바로 성공한 기업이 탄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컵의 절반가량을 채운 물을 보고 '반밖에 안 남았네'와 '반이나 남았네'라는 해석이 전혀 다른 상황을 연출하는 것과 같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제일 먼저 뛰어들어 실패하는 경험이 대기업에 취업한 경험 못지않게 좋은 경력으로 인정받는다. '대박을 터트리기까지 평균 4회 가까이 실패한다'라는 통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패를 격려하는 문화가 있다." -정재승 <열두 발자국>
그런 의미에서 나도 성공을 꿈꾸며 창업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 그때의 설렘이 지금도 전해진다.
무더운 여름 만원 지하철, 아이디어가 솓다
2년 전 어느 여름날이다. 나는 여느 때처럼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이 막 플랫폼을 떠났음에도 몸을 실지 못한 사람이 여전히 많았다. 족히 또 한 대는 보내야 내 차례가 될 수 있었다.
그날은 유독 더웠다. 내리쬐는 햇볕에 아침부터 기온도 높았지만 이제 엉덩이보다 더 많이 나온 배가 체온까지 올렸다. 임신 6개월 차로 접어든 때이기도 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스친다. 바람 자체가 시원하진 않았지만 젖은 땀 위를 스치며 시원함이 느껴졌다. 꼬리잡기가 이어지며 플랫폼 속 사람의 밀도가 더 높아질수록 이상하게도 바람은 자주 불어왔다. 주변을 둘러봤다. 양옆, 그리고 앞사람까지 모두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나보다 더 시원함을 느껴야 할 그들의 표정이 그리 편치만은 않은 것이 느껴졌다. 이들 대부분은 한 손엔 선풍기를 또 다른 한 손엔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오른쪽 여자는 어깨에 멘 에코백이 계속 흘러내리는지 이따금 어깨춤을 춘다. 그나마 드라마를 보는 내 앞의 한 남성은 별다른 미동은 없었지만, 가슴 높이에서 고정한 그의 양팔을 보니 내 어깨까지 결리는 기분이다.
머릿속이 반짝했다. 휴대용 선풍기와 스마트폰 거치대의 만남. 융복합이 대세인 이 시대에 적합한 아이디어 상품이었다. 거기까지였다. 창의력은 발휘했으나 도전정신은 그에 못 미치며 성과 없이 한 해를 보냈다.
1년 후인 지난해 여름, 작년보다 더 더울 것이라며 온갖 매체에서 엄포를 놓는다. 그때 마침 머릿속 한쪽에 고이 접어둔 휴대용 선풍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와 같은 상품을 본 적이 없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인데요?"... 그런데
과거 취재하면서 만난 한 사회적기업 대표가 떠올랐다. 주변 청년들에게 창업 멘토 역할을 하던 그였다. 예비 창업자로 그를 찾았다. 기밀을 건네듯 손으로 그린 아이디어 상품 설계를 쓱 보였다. 그는 단박에 이해했고,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답했다. 다만 "워낙 아이디어 상품이 많기 때문에 이미 시중에 나온 상품일 수도 있다"라는 얘기로 나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나의 아이디어를 인터넷에 검색해본다. 다행히 같은 상품이 없었다. 이번엔 특허청 홈페이지로 들어가 특허상품을 검색한다. 역시 유사 제품은 없었다.
일단 특허를 내고 내년을 목표로 제대로 된 상품을 준비하기로 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일단 정부 지원사업에 신청해서 시제품을 만들고 상품개발, 마케팅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장밋빛 미래를 예고했다.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사업을 할 수 있다니' 진정을 시켜도 가슴은 쉴 새 없이 뛰었다. 일주일 뒤 변리사를 만나 특허를 취득하는 과정을 진행키로 했다.
이쯤 되면 그다음 얘기가 짐작이 갈 수도 있겠다. 대표와 변리사를 찾아가기로 한 하루 전날이다. 대표로부터 메신저로 링크하나가 전해졌다. 불길한 예감이다. 늘 그렇듯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스마트폰 화면에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 상품과 흡사한 아니 그 아이디어 상품에 셀카봉까지 추가한 더 진보된 융복합 상품이 비쳤다. 대표의 메신저가 뒤이어 도착했다.
"지난해 이 상품이 시장에 나왔지만, 가격이 비싸다 보니 뜨지 않은 상품이네요. 실망하지 마세요. 이 정도의 관찰력을 통해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사람이라면 충분히 더 좋은 사업도 가능하니 힘내세요."
일주일간 머릿속에 그려온 꿈이 현실로 나타나진 않았다. 그래도 얻은 것이 있다. 내게도 가능성은 있다는 것.
사업은 아무나 할 순 없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도전정신과 창의력을 발휘해 시도한다면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것은 덤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도 재도전에 대한 정부 지원이 늘고 있다는 것 역시 고무적이다.
'나는 절대 안 돼'가 아닌 '나도 될 수 있다'는 생각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성공한 기업으로 꼽히는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 모두 실패 이후 나온 결과물이다. 그들 옆에 나란히 할 기업을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생각지도 못했던 물을 사 먹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듯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직업에 사업가가 꼽히는 시대에 사는 날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https://blog.naver.com/hobag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