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은 국제화 시대라는 20세기 후반에도 해외여행이 금지된 상태였다. 국가보안법과 사회안전법의 굴레 때문이다. 다행히 1987년 6월항쟁과 함께 독재세력의 위세가 약화되면서 분위기는 차츰 바뀌어갔다.
민주화 열기가 다시 부풀어 오르면서 원주 봉산동 토담집은 여전히 한살림운동 관계자는 물론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줄을 섰다. 그때마다 부인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음식을 준비하고 술상을 차렸다. 때로는 식량이 바닥나고 반찬이 밑바닥을 보였지만 남편이나 부인은 서로 탓하지 않았다. 부창부수란 용어는 이럴 때에 적격이다.
1980년대 후반에도 당국의 감시는 계속됐다.
그런데도 선생님댁에는 시대의 방향을 묻고 삶의 지혜를 얻고자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하루종일 손님이 끊이질 않아 선생님은 쉴 틈이 없었고, 가난한 살림에 그 많은 손님들을 치르느라 사모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곁에서 무위당을 모시고 있던 김영주 선생님은 '이러다 큰일나겠다' 싶었다. 선생님 건강도 염려됐지만 저렇게 많은 손님을 치르다가 사모님이 쓰러질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다. "선생님 내외분을 며칠만이라도 편히 쉬게 해드릴 방법이 없을까? 곰곰 생각하다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없는 해외로 모시고 가자"는 생각을 했다. (주석 1)
측근들이 이들 부부의 건강을 염려하여 며칠간이라도 쉬도록 하는 논의가 있었고, 국내 보다는 가까운 일본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았다. 여권 발급이 쉽지 않았다. 누군가 전언이 일본에서 초청자가 있으면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마침 김영주 씨가 현민공제조합의 고문으로 있어서 어렵지 않게 초청장을 받을 수 있었고, 이를 첨부해 여권을 신청했더니 발급되었다. 김영주 부부와 장일순 부부는 1989년 5월 28일 일본 여행길에 올랐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첫 해외 여행길이었다.
일본에 도착해 여장을 풀자마자 김영주 선생님은 무위당을 모시고 현민공제협동조합을 방문했다. 현민공제는 도쿄 북쪽 사이타마현 오미아(大宮)에 있는 생협에서 운영하는 공제조합(共濟組合)이다.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생협이 공제사업을 할 수 있게 법으로 보장돼 있다. 현민공제는 1973년에 생명보험료가 비싸서 가입할 수 없는 조합원들을 위해 설립했는데, 사이타마현 720만 명 인구 중 288만 명이 조합에 가입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현민공제의 마사키 회장은 부지런하고 활기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무위당과 마사키 회장은 몇 마디 말을 나누자마자 서로 마음이 통했다. 금세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선생님이 댁에서 써서 갖고 간 '정기이물정(正己而物正)'이란 붓글씨 한 점을 선물로 주었다. '스스로(自己)를 바르게(正)해야 만물(萬物)을 바르게(正)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선생님은 '정기(正己)'라고 쓴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기(己)자를 당신의 이름인 목(木)으로 바꾸어 읽어라. 그러면 정기이물정(正己而物正)이 정목이물정(正木而物正)이 된다. 정목(正木)이 만든 물건은 바르고 정확하다는 의미가 되지 않느냐"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난 마사키 회장이 환호작약했다. 고사성어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풀이한 지성과 위트가 넘치는 해석에 회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주석 2)
장일순의 휘호 얘기가 알려지면서 회사 직원들이 너도 나도 부탁하여 하룻동안 23점의 작품을 써주었다. 일행은 이튿날 도쿄를 구경하고 나라를 거쳐 고베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일본 유기농 운동의 선구자로 장일순을 오래 전부터 존경하는 고베대학의 야스다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야스다 교수의 안내로 해안 국립공원으로 유명한 도요오카로 향했다. 그곳은 야스다 교수의 고향이기도 한데 그는 아름다운 고향을 무위당 선생님께 구경시켜 드리고 싶었다.
도요오카로 가는 도중에 야스다 교수가 지도하고 있는 유기농 마을에 들렀다. 야스다 교수가 주민들에게 무위당 선생님을 "한국에서 오신 유명한 분"이라고 소개하자 마을 촌장이 강연을 부탁했다.
선생님은 30여 명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즉석에서 생명사상에 대한 강연을 했다.
"여러분, 야스다 선생이 하는 유기농 운동은 생명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여러분이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농사꾼인데 인간에게 해로운 농약 친 농산물을 생산하면 되겠는가 이 말입니다. 야스다 선생이 왜 이렇게 열심히 하냐 하면 착한 여러분들이 농약으로 살인자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말씀에 야스다 교수는 우쭐했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서 유기농업이 초창기였고 농약을 친 농산물보다 수확량이 적어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야스다 교수를 한껏 추켜 세워주니 얼마나 산바람이 났겠는가. 신이 난 건 농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창한 일본어로 게다가 한문까지 써가며 편안하면서도 재미있게 강연하는 선생님의 지성스러움에 다들 반한 표정이었다. 농부들은 "야스다 교수의 권유로 유기농업을 시작했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도요오카에 도착할 때까지 몇 군데 유기농 마을을 더 들렀는데 선생님이 강연을 잘 하신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가는 곳마다 강연을 부탁해왔다. 졸지에 선생님은 순회강연자가 돼버렸다.
김영주 선생이 귀엣말로 "어찌하다보니 유람여행이 강연여행이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하니까 무위당 선생님이 "그래, 그렇게 됐구먼"하며 기분좋게 웃으셨다.
도요오카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관광을 즐길 수가 있었다. 일행은 벳푸 온천관광과 쿠우슈우 여행을 한 뒤 열흘간의 일본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주석 3)
주석
1> 김찬수,「무위당 일본가다」,『무위당 사람들』, 57호, 2016. 11.
2> 앞의 책.
3>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