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 열차를 타고 익산 김제에 이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들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전에는 여러 곳에서 눈이 닿는 그곳까지 아득한 지평선을 볼 수 있었으나 곳곳에 지반을 높여 도로를 만들고 ktx 선로가 지나며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지점은 몇 곳 남지 않았다.
넓은 들은 정읍 쪽으로 진행되다가 차츰 앞을 막아선 크고 작은 여러 산들에 의해 이곳저곳으로 나누어진다. 그렇다고 들이 산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고마워한다.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아니었다면 저 넓은 들이 어찌 가슴가득 벼를 품을 수 있었으랴 산이 들을 살리고 들은 사람을 살린다.
그럼 사람들은 산을 살려야 한다. 이렇게 돌고 돌아가며 서로를 살린다. 사는 것도 삶이고 살리는 것도 삶이다. 들이 끝나고 산이 시작 되는 곳 산이 들을 어루만지며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했다며 어루만져 주는 곳 그곳에서 '피향정' 탐방을 시작 해보자.
호남평야 남쪽에 이르면 원평천, 고부천, 정읍천 등의 크고 작은 물줄기가 먼 산으로부터 흘러나와 들을 적시는데 가장 큰 수로는 동진강이다.
섬진강 댐에서 시작된 동진강 물줄기가 드디어 들을 만나 아낌없이 사방으로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기 시작하는 즈음에 태인이라는 작은 면소재지가 있고 그곳에 '피향정'이라는 역사 오랜 정자가 우뚝 서있다.
조선시대에는 현이었다가 고부와 더불어 정읍으로 편입되었고 이제는 쇠락한 면 소재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지난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입에 침을 튀기며 마치 어제 일인양 자기가 보았던 사실인양 떠들어 대곤 한다.
어느 고장이든지 자랑이 없으랴만 여기도 할 말이 많은 마을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 '고운 최치원'선생이 다녀가셨고, 조선시대에는 '이순신' 장군께서 정읍현감을 지내시다 이곳까지 겸임하셨고, '인현왕후'께서 영광군수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지나가셨고, 영조 생모인 숙빈 최씨의 고향이고, '대장금'이 출생했고, 동학혁명 때 수천 명이 나갔고, 역시 동학군이 마지막으로 전투를 치렀고, 그때 태인 군수로 재직 중이던 '벽초 홍명희' 선생의 아버님이신 '홍범식' 군수께서 패전한 동학군들을 숨겨 주셨다는 이야기에 증산교를 창건한 '강증산'께서 여기저기에 머물렀단 고사까지.
자세한 내용이야 다소 틀릴지 몰라도 큰 줄거리는 동일한 레퍼토리를 여러 번 되풀이해도 언제나 새롭다는 듯 말하는 곳이다. 어쩌다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하나 나오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갑론을박하며 막걸리 서너 병을 순식간에 먹어 치워 없애는 열정들이 그나마 향토사를 지키는 힘 아닐까.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할아버지에게서 손자로 전해지고 유물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곳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레 여기는 유적이 '피향정'과 '연지-연 방죽-'이다. '피향정'은 한자로 '披香亭'이라고 쓴다.
이곳 사람들은 어떤 방향에서든 향기가 들어오는 정자라고 해석을 하는데, 예전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상연지, 하연지'라 하여 커다란 두개의 연 방죽이 있었고 작은 배로 건너다닐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도 연꽃 향기가 건물로 날아들었기에 이러한 이름을 얻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상연지'가 매워져 '하연지'만 남아있다.
건물의 입구 쪽은 '피향정' 반대편에는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걸로 보면 옛 조상들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내린 듯하다. 지금은 '피향정'이라고 쓰여 진 원래 입구 쪽을 막고 '하연지'가 내려다보이는 담을 허물어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잘 보이게끔 하였는데 과연 이게 잘하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한다.
전통건축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맞배지붕이니 초익공이니 하는 단어들은 봐도 모르고 보지 않아도 모르는 것이지만 안내문에는 그런 내용으로 가득하니 그냥 훑고 지나갈 만하다. 물론 간단한 상식으로 맞배지붕이니 초익공이니 하는 정도는 아는 분들이 많겠지만 우리나라의 유적 유물안내판은 언제보아도 어려운거 같다.
언뜻 보아 '피향정' 건물의 백미는 건물을 받치는 스물여덟개의 돌기둥이다. 어른 둘이 손을 맞잡아야 안을 수 있는 굵은 돌기둥에 건물을 올리고 다시 지붕을 받치는 스물여덟개의 나무기둥을 세운 이 건물을 보며 둥그런 돌기둥 하나하나가 정겹기도 하지만 왜 기둥숫자가 스물여덟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면 이는 유적을 보는 태도가 아니다.
왜 스물여덟인가 스무 개를 세워도 서른 개를 세워도 충분히 지탱할 만한데 왜 스물여덟이어야 하는가... 조상들은 숫자를 함부로 쓰지 않았다. 반드시 무슨 연유가 있고 나는 그걸 찾아야만 한다.
'서울 경복궁 내에 있는 경회루의 기둥은 48개이다. 이는 해의 길이 및 그에 따른 자연 상태를 기록한 24절기와 항간에서 쓰이던 24절을 합한 숫자다. 항간에서 쓰이던 24절이란 우리나라보다는 중국에서 훨씬 잘 지켜졌는데 '춘절 원소절 중추절 칠석절 중량절...' 등등의 명절을 가리킨다. 춘절은 설이고 원소절은 정월보름 중추절은 추석이고 중량절은 9월9일이다. 여하튼 이렇게 두 가지 절기를 합해 48이란 숫자를 만들었다 전해지는데, 여기 있는 28은 대체 무엇인가...'
건물을 한두번 돌아보며 생각을 해 본다. 아! 알겠다. 28수다. 황도를 따라 늘어서있다는 별28개 '각 항 저 방 심 미 기---'라고 들어 보던 기억이 난다. 그렇담 저 돌기둥 하나하나는 별이다. 그리고 이 정자는 별 위에 세운 건물 아닌가.
별을 잡아다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은 '하늘 정자' 구나.. 달나라든 별나라든 홍길동의 율도국이든 그곳에 집을 짓고 산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별을 잡아다 기둥으로 받치는 스케일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입이 딱 벌어진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상상력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다들 이 정도는 되지 않나요? - 라는 듯한 표정으로 시침을 뚝 떼며 날아갈 듯 이렇게 서 있다니...이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 모습은 찾는 사람의 눈에만 제대로 보이고 겉으로 보면 그냥 수수한 정자일 뿐이다. '유홍준'선생님께서 아는 만큼 보인다 하셨는데, 이 자리에선 찾는 만큼 보인다.
남원 광한루에 가보면 한 귀퉁이에 桂觀(계관)이라고 쓰인 편액이 있다. 처음에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계수나무로 지은 궁전이란다. 계수나무는 달에 있는 나무라 치고 보면 달나라에 있는 궁전이라는 셈이다. 다만 광한루가 글씨로 말로 달나라 궁전이라고 써 붙였다면 피향정은 자기의 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모를 때면 무심할 수 있으나 알고 나면 조심 스러워진다. 다만 이 모습은 찾는 사람의 눈에만 제대로 보이고 겉으로 보면 그냥 수수한 정자일 뿐이다.
한 칸 한 칸 조심스레 계단을 밟고 올라본다. 바로 눈앞은 연지이고 그 후로는 너른 들 저만큼 떨어져 다시 동진강의 제방 둑이고 그 너머로 다시 들이 열린다. '피향정'이라는 말 그대로 어디서 스멀스멀 향기가 밀려오는 듯하다. 어디 여름날 연꽃 향 뿐 였으랴, 봄이면 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온갖 향기가 밀려들었을 것이다.
혹 벼가 꽃필 무렵 들큼한 냄새를 기억하는 사람 있을까..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논둑길을 쏘다닌 사람이라면 아득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지도 모른다.
찬바람만 싱싱 부는 한 겨울날 정자에 올라 벼꽃냄새를 떠올리는 나는 '피향정'이라는 이름을 얻게 한 풍류객들의 연꽃향기에 벼꽃냄새를 더하고픈 농부여서 그런가보다.
면소재지에 있다 보니 언제나 정자의 아래를 오가는 사람들 모습이 보인다. 다만 정자마루를 오르는 사람은 없는 듯 바닥엔 먼지가 뿌옇다.
자못 건물이란 사람의 온기가 빠져나가면 쉬 망가지고 만다. 피향정도 마찬가지다. 원래 누구든 올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운 건물이니 그대로 써야 한다. 박물관 유리창틀 안에 보관하는 정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린애들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야 하고 누군가가 시를 읊어도 좋다. 천장에 걸린 수많은 옛 풍류객들의 편액에 현대인들의 시 하나를 첨가하다면 더 아름다울 일이다. 아니 그냥 올라와서 잠시 멍하니 있다만 가도 좋다. 천상의 정자에서 잠시 쉬어간다 그 뿐이다. 정자도 나도 서로서로 고마운 일이다.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때 '고운 최치원'선생께서 지었고 그 후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다 하고 지금 모습은 조선중기에 고쳐지은 모습이라고 한다. 다만 '피향정'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전해 내려온다.
어떤가? 당신도 천상의 정자로 한번쯤 힐링여행을 떠나지 않으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