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 "박정희를 본받으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한겨레> 2009년 7월 13일자). 고교 평준화, 공공 의료보험, 그린벨트 등을 진보에서는 지키려 하고 보수에서는 허물려 하는데, 알고 보면 이 세 가지 정책이 모두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거죠.
이번엔 "이명박을 본받으라"입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유일하게 사교육비가 줄어든 시기가 이명박 정부 시기 3년간이거든요. 대학입시와 외고입시에서 '전형요소의 복합성'을 낮춰 부담을 줄이고, 수능의 난이도를 낮춰 이룬 결과였습니다.
드라마 < SKY캐슬 >을 계기로 다시 일어나고 있는 학종(학생부 종합전형) 논란에 즈음해, 저는 이명박 정부 정책을 벤치마킹하여 학종에서 전형요소의 복합성을 줄이기 위해 가장 부작용이 심한 '수상실적'을 학종에서 뺄 것을 주장합니다.
이명박 정부 3년의 비밀
이명박 정부 첫 해인 2008년과 2년차인 2009년에는 학생 1인당 사교육비가 늘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사교육비가 빠르게 늘던 관성도 있었고, 이명박 정부 초기 영어몰입교육 파동, 일제고사 시행, 자사고 급증 등으로 인해 불안과 경쟁심리가 커졌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 중후반인 2010~12년에는 학생 1인당 사교육비가 조금씩 줄었어요. 그 이전에 사교육비가 줄어든 경우는 IMF 외환위기가 닥친 1998년 딱 한 해밖에 없었고, 그것도 다시 급증해서 불과 2년 뒤인 2000년이 되면 외환위기 이전인 1997년 수준을 회복했거든요(당시엔 학생 1인당 사교육비 통계는 없었고 가구당 사교육비 통계로 대체). 따라서 2010~2012년 3년 연속 사교육비가 줄었다는 것은 상당히 눈에 띄는 통계입니다.
저는 입시부담과 사교육의 원인 중 80%는 구조적 요인, 즉 대학서열과 노동시장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여기에 대한 대책은 며칠 전 칼럼 "SKY캐슬에서 벗어나고 싶어?"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경향신문> 2019년 1월 23일자). 그런데 나머지 20%는 선발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20%를 보다 자세하게 분석해 보면 다음 세 가지 요인이 영향을 준다고 보입니다.
[난이도] 교육과정이 아니라 평가가 문제
사교육업계에서 매우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경험적 사실입니다. 내신이든 수능이든 논술이든 간에 난이도를 높이면 사교육이 늘고 난이도를 낮추면 사교육이 줄어듭니다. 주의할 점은, '교육과정의 난이도'와 '평가의 난이도'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보다 중요한 건 '평가의 난이도'입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교육과정 하에서도 수능 난이도가 물수능/불수능 등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고교 내신도 2004학년도 고1부터 상대평가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중간·기말고사 난이도가 그 이후에 비해 낮았습니다.
미국 SAT의 경우 어려운 과목인 물리는 평가 난이도를 낮추고, 쉬운 과목인 생물은 평가 난이도를 높입니다. 교육과정 난이도와 평가 난이도가 다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물리 점수가 높게 나오게 해서 학생들이 물리를 선택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실제로 물리 만점자 비율이 생물 만점자보다 훨씬 많습니다(절대평가여서 가능한 일입니다. 절대평가에는 등급제만 있는 게 아니라 원점수제도 있습니다. SAT의 원점수 보정(equating)을 흔히 상대평가를 위한 보정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시험 회차별 난이도를 보정하기 위한 절차일 뿐입니다).
[다양성과 복합성] 다시 등장한 '죽음의 트라이앵글'
흔히들 대입제도가 옛날보다 '복잡해졌다'고 말하는데, 엄밀히 보면 두 가지로 구분 가능합니다.
① 전형종류의 다양성 : 전형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내가 어느 전형에 적합한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만큼 정보비용이 발생합니다. 경기 종목이 다양해질수록 어느 종목을 골라 준비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워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대입 전형이 다양해진 것은 2000년대 수시전형이 생기면서부터입니다. 논술, 내신, 적성검사, 특기자(이것도 세부적으로 여러 가지) 등등 여러 종류의 전형들이 나타났고 이런 전형들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2000년대 대입 컨설팅의 목적은 '어느 대학을 지원할 것인가'와 '어떤 전형을 선택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② 전형요소의 복합성 : 얼마나 여러 가지 전형요소를 복합적으로 요구하느냐는 겁니다. 출전할 종목이 단일 종목보다 5종 경기, 5종 경기보다 10종 경기가 될수록 부담도 커지고 준비전략도 복잡해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전형요소의 복합성이 매우 컸던 사례로 1994~96학년도 '수능+내신+본고사', 노무현정부 마지막 해 치러진 2008학년도 정시전형의 '수능+내신+논술'(이른바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입정책의 실패를 상징하는 말이 바로 이 '죽음의 트라이앵글'입니다.
당시 학생들의 부담과 사교육 증가가 극에 달했습니다. 저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는 말이 대중화되기 1년여 전인 2005년에 이미 "역사상 최악의 입시제도가 온다"는 글로 이를 경고한 바 있었습니다(<한겨레> 2005년 7월 23일자).
학종도 '내신+수능+비교과'라는 면에서 복합성이 큽니다. 내신의 비중이 제일 크고, 수능도 최저학력기준으로 반영되는 경우가 많고, '비교과'는 세 글자에 불과하지만 독서, 동아리, 봉사, 수상실적, 소논문(올해 고1부터는 폐지) 등등 매우 다양한 전형요소들이 포함되지요. 그래서 최근 대입 컨설팅의 목적은 '시기별로 각 전형요소들을 어떠한 내용으로 만들어낼 것인가'를 해결하는 것이 되었고, 학종 비중이 커지면서 학생들의 부담과 컨설팅 수요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어떻게 사교육을 줄였나?
이명박 정부는 전형요소의 복합성과 난이도를 통제함으로써 사교육을 일정 수준 억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첫째, 이명박 정부는 대입 선발에서 전형요소의 복합성을 줄입니다. 이를 위해 2008학년도 대입 정시전형의 '죽음의 트라이앵글', 즉 '수능+내신+논술'을 허물어냅니다. 집권하자마자 대입제도를 3년 전에 예고하는 관행을 깨고 2009학년 대입 정시전형에서 논술을 폐지해 버립니다.
그리고 정시전형에서 내신 반영비율을 자율화하여 내신을 반영하지 않아도 되게 만듭니다. 이때부터 정시전형은 지금과 같은 '수능 위주 전형'이 됩니다. 아울러 2012학년도 수능부터 과학탐구·사회탐구 과목수를 최대 4과목에서 3과목으로 줄입니다(이후 박근혜 정부 시절 2과목으로 감소).
둘째, 이명박 정부는 특목고·자사고 선발에서 전형요소의 복합성을 줄입니다. 2000년대 외고 학생선발에는 늘 공인영어시험(토플·텝스), 수학시험(창의사고력), 영어듣기평가 등의 각종 시험이 전형요소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외고 전형에서 일체의 시험을 폐지합니다. 아울러 선발 시 중학교 내신성적 반영과목을 영어 한 과목으로 제한합니다. 이로서 전형요소의 복합성이 대폭 줄어듭니다. 참고로 이명박 정부 시절 자사고가 급증했지만 이때 늘어난 자사고들의 학생 선발방식은 대부분 '추첨'이었습니다.
셋째, 이명박 정부는 수능의 난이도를 낮춥니다. 2012학년도에 전 과목 만점자가 무려 30명이 나옵니다. 그 이전에는 만점자가 안 나오거나 나와 봤자 1명이었으므로, 2012학년도에 수능 난이도가 극적으로 낮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수능 전 과목 만점자가 꾸준히 나와서 2013학년도 6명, 2014학년도 33명, 2015학년도 29명, 2016학년도 16명, 2017학년도 3명, 2018학년도 15명이었고 '불수능'으로 보도된 지난 2019학년도 수능에서도 전과목 만점자는 17명이었습니다.
참고로 2011학년도 수능부터 EBS 교재를 70%까지 반영하기 시작한 것도 체감 난이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4년부터 수능에 EBS 교재가 반영되기 시작했으나 꾸준히 지속되고 관리되지 못했습니다. 이를 이명박 정부에서 성공시킨 것이지요.
수상실적, 이렇게 미지근하게 두면 탈난다
새삼 학종의 '공정성' 논란에 말을 보태진 않겠습니다. 저는 공정성 논란에 가려진 또 다른 측면, 즉 학종에서 전형요소의 복합성이 매우 커서 부담이 크다는 점을 제기합니다. 이건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다 미국 따라가다 생긴 일이지요. 제가 예전부터 지적해온 것처럼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난잡한 대입제도를 가진 나라인데, 이게 좋은 줄 알고 들여와서 이 탈이 난 겁니다.
< SKY캐슬 >은 학종의 문제점을 매우 자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시(수능)를 늘리자고 주장하는 분들의 주장이 최근 더욱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 2018년 대입 공론화까지 거쳐 내린 결론, 즉 올해 고1이 대학에 가는 2022학년도 대입부터 정시(수능)를 30% 이상으로 늘린다는 결론을 전면적으로 번복하기는 어렵겠지요. 문재인정부가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개선안이 필요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학종 비교과 가운데 가장 부작용이 심한 전형요소가 '소논문'과 '수상실적'(교내)임을 지적하고, 이를 폐지하자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학생의 부담이나 사교육 유발효과가 가장 크고, 실제로 사교육이 발달한 지역의 사교육 학종 프로그램의 핵심이 이 두 가지입니다.
다행히 정부는 대입 공론화를 통해 소논문을 올해 고1이 치르는 2022학년도 대입부터 금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수상실적은 계속 허용하되 학기당 1건만 활용 가능하도록 제한하는 데 그쳤습니다. 수상실적에 대한 이러한 미지근한 결정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1) 수상실적을 금지해야만 소논문 금지의 취지가 제대로 살아납니다. 예를 들어 '교내 과학탐구 대회' 등의 명목으로 사실상 소논문을 내도록 하고 이를 심사하여 상을 주는 사례가 매우 많습니다. 소논문이라는 표현만 쓰이지 않을 뿐이지, 학종에서 소논문이 수상실적의 일부로서 계속 통용될 것입니다.
2) 다주택자에게 집을 팔도록 압박하면 '똘똘한 집 한 채'를 어떻게 선별할까를 고민하게 되듯이, 수상실적을 학기당 하나씩만 활용하도록 제한하면 '똘똘한 상 한 개'를 어떻게 얻을지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수상실적 사교육을 어느 정도 줄이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수상실적 '전략'에 대한 수요를 줄이지는 못하는 것이죠. 특히 컨설팅 사교육을 줄이지 못할 것입니다.
3) 제가 '골든 로드'라고 명명한 전략, 즉 영재학교·과학고 입시를 위해 극단적인 수준의 선행학습에 투자한 뒤, 설령 일반고로 진학하게 되어도 선행학습에 기반해 수학·과학 경시대회 수상실적 스펙을 쌓아 명문대에 도전하는 전략이 계속 유효합니다. 극심한 선행학습을 조장하는 제도적 환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영재학교·과학고 선발제도 개선과 함께 학종에서 수상실적을 배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범 기자는 교육평론가입니다. 이 기사는 이범 교육평론가의 페이스북 글을 본인의 동의를 얻어 편집해 게재한 것입니다. 이범 교육평론가의 수능-학종 논란, '골든 로드'에 대한 의견은 원문(https://www.facebook.com/bohmlee/posts/10156997905143774)에서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