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어린이집 가방 두 개를 들쳐 메고 등원길에 나선다. 큰 아이 가방 하나, 작은 아이 것 하나. 작은 아이가 뛰어다닐 만큼 자란 지금에야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그렇지만 걸음마도 못 뗀 13개월 즈음 어린이집에 갓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가로 세로 1.5m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갈 때면 늘 긴장했다. 오늘은 또 누가 지옥으로 향하는 선의를 표할 것인가!
"작은 애도 어린이집 가요? 몇 개월이에요?"
"13개월이에요."
"아이고, 너무 어린데..."
아이 엄마의 행색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보니 화장도 안 하고 옷차림도 잠옷(홈웨어라 말하면 그럴 듯해 보이려나요)에 외투만 걸쳤다. 누가 봐도 워킹맘은 아닌 듯하다. '너무 어린데'에 이어지는 말줄임표 속에서 '집에서 노는(?)데, 걸음마도 못 뗀 아이를 어린이집 보낸다'는 나무람을 느낀다.
이웃들이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눈빛과 제스처로 질책했던 걸까. 아니면 '일도 안 하면서' 벌써 아이가 어린이집에 입소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의식이 과잉됐던 걸까. 그도 아니면 보육료 정책 기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집에 노는 엄마들은 가정 보육을 하라'라는 댓글들이 눈에 밟혔던 걸까.
젖도 못 뗐던 둘째의 몫까지 가방 두 개를 메고 가는 3분 남짓, 유난히 허겁지겁 달렸다. 허다하게 '아이고, 너무 어린데...'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꾸역꾸역 등원길에 올랐다. 우리 가정의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의 시선만 잘 견디면 얻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육아의 틈에서 숨쉬기, 우리집이 변했다
두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전쟁터('발 디딜 틈이 없다'는 표현을 육아하면서 매일 마주한다) 같은 집을 정리한다. 외출복 입히느라 이곳저곳 벗어둔 내복을 빨래 바구니에 넣고, 미처 정리하지 못해 반찬 냄새 풍기는 식탁을 정리한다. 세탁기 돌리고, 이불도 개고, 분리수거 한 후 방청소와 분리수거를 마치면 2시간 훌쩍 간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내 시간이다.
어린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내가 하는 일은 '고작' 책 읽기다. 그동안 아이가 깰까봐 새벽에 숨죽여 책을 읽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좋아하는 음악도 들으면서, 달달한 믹스커피까지 곁들인 독서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다.
그리고 '기껏해야' 블로그에 글도 쓴다. 소소한 일기를 적기도 하고, 서평도 쓴다.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삶의 틀을 다듬어가는 작업이다. '돈 한 푼 되지 않는 책 읽고 글 쓰려고 젖먹이 어린이집 보낸 게 잘한 일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단언컨대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동안 육아에 매몰되어 있어 세상 접할 일이 없었다. 엄마표 미술놀이를 해줄 만큼 정성껏 아이를 돌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늘 시간에 허덕였다. 밥 먹고, 씻기고, 간식 먹이고, 낮잠 재운 후, 또 밥 먹고, 씻기는 무료한 일이었음에도 바쁘고 지쳤다. 바깥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내 삶이야 앞으로 어떻게 되든, 눈앞의 육아 거리를 해치워야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가내수공업에 버금가는 단순 육아에서 벗어나니 다른 세계가 눈 앞에 놓였다.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을 읽으면서, 비트(bit) 세계와 아톰(atom) 세계가 융합되는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입시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또 타샤 튜더의 <타샤의 정원>을 읽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길러 볼 딸기 묘목을 들여오기도 했다.
나를 위해 낸 시간은 결국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상호호혜의 시간으로 탈바꿈 했다. 낮 동안 회복한 몸의 기력과 정신의 넉넉함 덕분에 아이들 하원 후에는 두 까꿍이와 엄마표 미술놀이도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엄마를 '폴리'라고 불러도 더 이상 설거지한다고 도망가지 않고 함께 놀기도 한다. 남편에게도 득이 되었다. 낮시간 동안 정리된 집 덕분에 저녁에 공동으로 부담해야 할 가사노동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보기에 우리 둘째는 어린이집 가기에 너무 어린 나이일 수 있다. 그런 시선이 무겁고 때론 아프기도 하다. 아무리 작은 까꿍이가 어린이집에서 잘 놀고, 방긋방긋 웃고 돌아온다는 걸 알아도, 이웃이 던진 '너무 어린데' 말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이유는 실제로 우리 4인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36개월 애착 육아가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가정마다 2019학년도 어린이집 새 학기를 준비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여러 사정에서 어린 자녀를 어린이집에 첫 입소시키는 부모들의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36개월까지는 아이를 부모 손으로 키워야 한다는 '36개월 애착 육아' 신화에서 진작 이탈한 미더운 부모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아이를 키우는 게 양육자의 본분인데 마치 직무유기를 하는 듯한 찝찝한 마음을 도무지 떨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죄책감은 보너스다.
그러나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낡은 격언을 떠올려 보자. 한 마을이 꼭 한적한 시골마을의 이웃들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보육교사 자격을 갖춘 어린이집 선생님들 또한 우리 아이들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을 주실, 어엿한 '한 마을'의 일원이다.
스웨덴 엄마들은 24시간 아이와 붙어서 돌보아줘야 애착이 형성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는 아이가 지내는 안정된 환경을 더 중요시한다....(중략)....돌이 지나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 어린이집에 적응하며 선생님들과 새로운 애착을 형성한다.
- 홍민정, <완벽하지 않아서 행복한 스웨덴 육아> 중.
<완벽하지 않아서 행복한 스웨덴 육아>의 홍민정 작가가 돌이 훌쩍 지난 둘째를 어린이집에 등록할 때의 일이다. 그때 주변 스웨덴 이웃들이 많이 걱정했다고 한다. 공동체 생활을 진작 시작했어야 할 나이에 아직도 집에 데리고 있냐면서 말이다.
한국 부모들은 36개월 주 양육자 애착 육아를 중요하게 여기고, 스웨덴 부모들은 12개월 어린이집 애착 육아를 철석같이 믿는다. 애착 형성이 중요하다는 이론에는 한국과 스웨덴이 모두 동의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양국이 다르다.
누가 더 옳은지 겨루는 일은 무의미하다. 다만 스웨덴 1인당 국내 총생산이 세계 10위이고, OECD 통계 중 스웨덴의 행복 지수는 세계 5위라는 점을 생각해 보자. 경제력과 행복지수에서도 밀리지 않는 그들을 보면, '12개월 어린이집 애착 육아'를 믿는 스웨덴인들의 선택 또한 존중할 만하다. 그러니 '36개월 동안 데리고 있는 것이 정답'이었던 단독 선택지에서 '좀더 어린 나이에 사회 보육도 장점이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자.
아이를 부모 품에 오랜 기간 데리고 있든, 반대의 선택을 하든, 괜찮다. 각자의 상황에서 가장 행복한 결정을 하자. 설령 집에서 노는 엄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http://blog.naver.com/dahyun0421)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