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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언니 오빠들이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내가 태어났다. 외가에서 근 십 년 만에 나온 아기는 예쁨을 그렇게도 많이 받았다. 친가에선 아들들 틈에서 간만에 등장한 여자애라 사랑받았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긴 시간을 입원해 계신 동안 나는 외갓집에서 지냈다. 여러 번의 수술과 수발에 지쳐있던 엄마는 유독 내가 고집을 심하게 부리는 날엔 화가 폭발하곤 했는데 나는 외할머니 등 뒤나 증조할머니의 한복 치마 폭에 자주 숨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들은 그런 걸로 애 잡지 마라, 저 때는 모든 애들이 저렇다, 여유롭게 엄마를 구슬렸다.

자아가 조금씩 뚜렷해질 무렵 '내가내가 병'에 걸렸던 나는 모든 걸 내가 하려 하면서 사고를 자주 쳤다. 장 봐온 달걀을 냉장고 문에 넣는 걸 돕겠다고 나대다 한 판 채로 엎어 엉덩이에 손자국 나도록 불나게 맞곤 했다. 엄마가 사랑을 넘어 분노의 매질을 한다 싶으면 두 할머니들은 또 나를 보호해 주셨다.

이제는 엄마가 나를 혼내는 일도 엉덩이를 때리는 일 따위도 없지만 그 어디에도 달려가 숨을 곳 또한 없다. 얼굴을 파 묻을 치마 폭도, 언제든지 온 팔로 말 없이 등을 토닥여 줄 사람도 없다. 두 할머니는 이제 안 계신다.

 
 외가의 두 할머니
외가의 두 할머니 ⓒ 정지은
 
-1990 대구, 외갓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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