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어감의 나라, 아프리카 모나코는 스페인의 코앞에 위치하고 있다. 아침 일찍일어나 모나코를 향해 스페인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 말썽많은 지브랄타 해협을 만났다.
스페인 함브르크 왕조의 결손으로 유럽의 여러 귀족들 사이에서 스페인의 왕조를 이을 왕권 점유 다툼이 벌어졌다. 마침내 영국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건축한 루이14세의 손자가 패권 다툼의 승리자가 되어 스페인 왕조의 계승자가 되었다. 영국 왕조의 후손은 대가로 이베리아 반도의 군사적 요충지인 지브랄타 요지를 영국에 내주었다.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진입하는 입구에 위치한 지브랄타 해협은 경제적으로 요충지이다. 군사적으로 통제하면 누구도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건널 수가 없다. 이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면 수개윌을 배로 달려 희망봉을 지나 아프리카를 한바퀴 돌아야만 향신료의 나라 인도로 가거나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
이 절대적 위치의 지브랄타를 회수하려는 스페인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영국은 육해군을 파견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 영국은 본토와 수 천 키로미터나 떨어진 이 곳에 군대를 파견하고, 본토와 지브랄타를 연결해 주는 직항 비행기를 운행하고 있다.
모로코는 한반도의 3배 면적에 인구 3300만, 모하에드 6세의 통치하에 아랍인 55%와 원주민 베르베르인 44%의 모슬림이 모여사는 입헌군주 국가이다. 평균 월급이 20여만원에 불과하지만 광활한 영토를 가져 먹는 것이 늘 풍부한 모로코인은 골격이 크고 잘생긴 미모를 가졌다.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이들에게는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정치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밴츠를 타지 않고 구찌를 입지 않더라도 이들의 행복지수는 높다. 얼마나 영양상태가 좋던지 남자 화장실 소변기가 높게 달려 있어서 동양인은 앞 발꿈치를 세워야 겨우 실례를 할 정도로 장신들이다.
스페인 최남단에 위치한 따리페는 아프리카 최서쪽의 모로코와 쾌속선으로 45분만에 이어주는 항구이다. 모나코에서 스페인 가는 배를 타는 곳은 탄저 항구이다. 세계2차 대전 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루즈벨트와 처칠 등이 회담을 열기도 한 역사적인 도시인 탄저는 아프리카와 유럽을 잇는 교두보다. 항구에는 포르투갈 등 적의 침입에 대비해 만든 견고한 성벽이 있다.
스페인에서 불과 13km 떨어진, 지중해의 아랫입술에 해당하는 매혹적인 모로코는 긴겨울로 우울한 겨울을 보내야 하는 유럽인에게는 최적의 휴양지이다. 대서양의 온화한 기후와 태양과 낮은 물가는 모로코의 2200km나 되는 서쪽 해안가 곳곳에 유럽인의 휴양마을을 조성했다.
중동국가와 정치적으로 마찰을 겪고 있는 미국인은 감히 중동 여러 나라를 관광할 용기는 못내고, 대신 모로코를 방문하여 아랍문화를 체험하고 이질적인 생활을 맛본다. 개발도상국으로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관광객이 쉽게 이국땅을 접하게 한다. 내년쯤에는 프랑스와 합작으로 건설중인 고속전철 떼제베가 개통된다고 하니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을 것이다.
동원산업 등에서 참치잡이를 위해 왔다가 정착한 분들을 포함하여 우리 교민은 600여명에 불과하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계속 늘고 있으니 이곳에서 관광 가이드로 직업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대학을 갓 졸업한 듯한 한국인 처자가 배에서 내리는 한국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국땅에서의 새로운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내내 대서양의 아름다운 쪽빛 바다와 광활한 평지가 펼쳐지고 유럽인의 휴양지가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다. 모르코의 수도 라바트에는 뚜르 핫산이 착공한 미완성 회교사원 첨탑이 있다. 로마인이 지은 건축물의 기둥을 뽑아와서 야자수 숲을 의미하는 무수한 기둥을 세우고 벽과 지붕을 짓는 도중 1755년 발생한 대규모 지진으로 건설이 중단되었다.
지금은 첨탑과 기둥이 있고, 옆에 현 왕의 아버지 무하메드 5세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견고함을 더하기 위해 군데군데 구멍을 뚫어 놓은 두꺼운 진흙으로 만든 외벽, 로마식 기둥과 첨탑이 남아 있다. 사방 입구에 전통 복장을 입은 군인이 지키고 있는 무덤 내부는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모로코는 여러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프랑스 네오바르코 화가인 유진 드라크로아는 1930년대에 모르코를 방문하여 시장생활, 할렘, 사자사냥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할리우드가 모로코의 신봉자가 되었다. 식민지 문화를 영화한 것을 필두로, 세계 2차대전을 배경으로 세남녀의 삼각 애정관계를 그린,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한 흑백영화 '카사블랑카'는 뭇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글라디에이터 등이 모나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카사브랑카의 명물은 모로코인이 돈을 모아 근래에 지은 핫산 2세 회교사원이다. 6.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과 2.5만명이 예배볼 수 있는 세계 3대 회교사원을 보기 위해 저녁예배 시간에 맞춰 달려갔다. 퇴근시간과 맞물려 시내의 교통혼잡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혔다. 신호등은 있으나 먼저 밀어 넣은 차량이 최고다.
트럭, 버스, 승용차, 오토바이 할 것없이 무질서하게 비집고 달려가고 그 사이를 사람들이 유유히 빠져 나간다. 4차선에서 버스가 U턴을 하는데도 차들은 경적없이 기다려 준다. 틈만 있으면 내가 먼저 차머리를 밀어 넣으면 모두가 용납되기 때문이다.
회교사원은 지독히도 컸다. 건물 전부를 한 화면에 다 집어 넣기가 힘들 정도다. 사원 내부는 모슬림이 아닌 외부자에게는 출입이 통제되어 외부에서 사진을 찍었다. 코레도바 사원같이 야자수 나무숲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터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 불루마스크와 같이 실내 공간을 충분히 확보되고 아라베스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침 8시 10분에 스페인을 출발하여 모로코 카사블랑카 시내 호텔에 밤 9시 10분에 도착했다. 4성급 호텔이라고 하지만 쫄쫄거리며 나오는 수도물로 겨우 샤워를 하고, 뒤척이면 떨어질 수도 있을 정도로 좁고 좁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로마의 지배와 중동에서 세력을 떨치고 일어선 아랍의 오랜 통치, 그외 많은 주변국가들로부터 침략을 받아온 중에도 베르베르인의 강한 독립성은 자신들의 고유의 전통과 문화양식을 지키게 하였다.
19세기 여러 유럽상인의 영향에 이어 프랑스, 스페인, 독일의 식민지배 쟁탈 중 1912년 프랑스가 대부분의 모르코를 점령하게 되었다. 인구 750만의 거대도시 카사블랑카는 현재에도 1930, 40년대에 프랑스가 계획하고 건설한 건물과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술탄 무하메드 5세가 1956년에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현재 무하메드 6세의 통치하에 있다. 프랑스로 독립한 1956년 이전에는 비자 없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었는데, 이 때 양 국가에 살던 모로코인과 그 후손들이 지금도 프랑스와 스페인에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은 고향 모로코에 살고 있는 부모와 친척들에게 수입 일부를 보내서 가난한 대가족을 부양하는 의무를 지키고 있다. 지금도 프랑스의 영향이 남아 모로코인 14세까지는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의무적으로 배우고 있다.
어둠이 걷히기도 전 7시 10분에 호텔을 떠나 시청, 법원, 중앙우체국이 모여 있는 광장에서 잠시 버스를 내렸다. 비교적 건물 규모가 적었는데 이는 모로코의 경제적 규모에 적당하다고 느껴졌다. 카사블랑카 시민이 사용하고 있는 1930, 40년대 번성하던 때에 프랑스인들이 세운 4,5 층 밀집 건물들은 웬만한 유럽 도시들을 능가해 보이지만, 가난한 모로코인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카사블랑카 영화에 나왔던 카페를 이 도시에 그대로 재현해서 대박을 낸 사람, 왕족, 귀족, 지주와 일부 자본가를 제외하고는 가난을 벗지 못하고 있다. 똑똑하더라도 신분을 뛰어 넘어 부자가 되는 것이 여간히 어렵고 힘들단다. 기득권자들의 견제가 너무 심하단다.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도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모로코을 상징하는 도시가 페스이다. 7세기경 모로코를 점령한 왕이 원주민 베르베르 여인을 취해 탄생한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808년에 이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도시내 왕궁앞 부지에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하여 관광객이 기념사진 찍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성지인 엘발리는 성벽과 큰 문으로 둘러싸여 웅장함을 더하고 있다. 거주민은 서남쪽 구릉지대 모여 성벽과 문에 기대어 중세의 삶을 살고 있다. 9500여개의 거리와 골목으로 이루어진 옛 도시에 살면서 아라베스크 문향의 각종 장식물, 카펫, 여성손발 염색제, 의류와 신발, 은세공품, 황동장식물, 채소, 염소발과 소발 등 중세시대를 연상시키는 모든 것들을 팔고 있다.
우리에겐 아득한 추억이 되어 버린 엿도 팔고 있는데, 파리가 잔뜩 꼬여든 불결함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도 그들은 잘먹고 탈없이 잘 산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다 고개를 돌려 보면, 좁은 공간에서 즉석으로 가죽을 재단하거나 은세공품을 두드려 만들고 아라베스크 문양의 받침대 등을 만드는 장인들의 바쁜 손놀림을 볼 수 있다.
페스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다. 대신 당나귀가 지나다닌다. 수많은 좁고 어두운 거리를 사람들은 잘도 헤쳐 다닌다.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용하다. 이 옛도심지 한편에는 1350경년에 세워진 메데르사 부 이나니아라는 신학대학이 있는데, 지금은 회교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침 기도시간이 되어 뭇 주민들의 바삐 들어가서 손발을 씻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한 좁은 골목길에서 창살 대문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식당에 들어갔다. 외부에서 보기와 다르게 건물 내부는 우리의 마당에 해당하는 넓은 소통의 공간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세 벽면을 잇는 또 다른 공간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더욱 화려하게 치장이 되어 있어 손님을 받는 식당 홀로 사용되고 있었다. 전통적 회교권 가구 구조로 크기나 화려한 장식으로 볼 때 옛 귀족의 집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곳에서 무슬림 전통 음식을 제대로 먹었다. 주식인 쿠스쿠스는 좁쌀같이 보이는 세모리나를 곱게 갈은 것으로 여러 야채와 닭고기가 함께 익혀 나왔다. 과일을 먹은 후 꿀을 섞은 민트차를 마셨고, 누구는 맥주를 시켜 마셨다. 모르코에는 금주령이 없다.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제로 등록된 페스의 명물은 가죽 무두질이다. 축산의 분뇨를 섞은 물에 가죽을 담궈 수작업으로 여러번 뒤척여 가죽이 부드러워지면 그제사야 빨갛고 파란 원하는 물감을 들인다. 그래서 모로코의 가죽을 최고로 친다.
가죽제품을 파는 건물 3층에서 이 풍경을 내려다 보는데 가축의 분뇨냄새가 얼마나 나든지 허브잎을 코에 꼽고 있어도 격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들 장인의 삶은 고되지만 보통 사람들의 3배에 가까운 수입을 얻어 자부심 속에서 일하고 있다.
페스에서 모로코에서의 마지막 숙소로 가는 길로 리프산맥을 넘는 국도를 선택했다. 평원과는 다른 느낌, 보리밭이 광활이 펼쳐졌다. 대자연으로부터 나오는 풍부한 먹거리는 모로코인들에게 가난하지만 배고품을 모르는 행복한 삶을 살게 한다.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오남매를 두고 손아래 시누이와 살고 있는 한 모로코 과부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녀는 학력이 없고 자신의 나이조차 모른다. 자고 일어나면 기도하고 자식들 먹이기 위해 일하는 반복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물었다. 자식들을 사랑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시누이가 제 짝을 찾고, 자녀들이 결혼해서 모두 떠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 과부는 철학적 대답을 했다. '그것이 자연이다.' 그들은 주어진 삶을 숙명처럼 받아 들인다. 배고프지 않은 삶이 그들을 낙천적으로 만들었다.
아프리카하면 흑인이 떠오르는데 이곳은 무슬림이 사는 백인나라이다. 율법상 아랍인들은 능력만 된다면 4명의 처를 둘 수 있다. 4명 처의 좋은 조화는 첫째 처는 관용을, 둘째는 회계와 재정 관리를, 세째는 요리솜씨가, 네째는 인물이 좋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부일처이니 이 네가지를 다 갖춘 여인을 찿을 수 있다면 최상일 것이다. 모두는 못 갖출 것이다.
최근 관심이 높아져 많은 한국인이 떠나는 모로코의 여행은 이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