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해방의 노래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아 들어보아라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 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조선음악동맹 작사, 김순남 작곡)

독립행진곡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서울 남산, 최초 태극기 게양 1945년 8월 15일 서울 시민들이 남산 국기게양대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8.15 해방은 온 국민의 기쁨이었지만, 천주교회로선 친일 전력으로 인해 혼란한 시간이기도 했다. 교회는 이날이 '성모승천대축일'이라는 이유로 '해방이 성모님의 은총이었다"고 말했다.
서울 남산, 최초 태극기 게양1945년 8월 15일 서울 시민들이 남산 국기게양대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8.15 해방은 온 국민의 기쁨이었지만, 천주교회로선 친일 전력으로 인해 혼란한 시간이기도 했다. 교회는 이날이 '성모승천대축일'이라는 이유로 '해방이 성모님의 은총이었다"고 말했다. ⓒ
마침내 해방의 날이 왔다.

하지만 1945년의 8ㆍ15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국토분단의 날이고, 1948년의 8ㆍ15는 단독정부 수립과 더불어 북쪽에 또 다른 정부가 수립되는 민족분열의 날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이중적인 8ㆍ15는 이후 한반도 전체는 물론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의 성격을 규제하는 족쇄가 되었다. 1민족 2국가의 원천적인 비극은 미ㆍ일의 해양세력과 중ㆍ소(러)의 대륙국가 사이에서 대리전이라는 동족상잔을 겪게 되고, 분단ㆍ외세영합의 세력이 남북에서 각각 지배 주류가 되는 역설의 구조를 만들었다.

1945년의 8ㆍ15는 본질적으로는 일본제국의 붕괴에 따른 새로운 전후 동아시아체제의 구축에 결정적인 계기가 성립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전범국가 일본이 아닌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앞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
1948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앞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 ⓒ
8ㆍ15는 1948년 남북에 분단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는 '해방절'로 불리다가 이후 남한에서는 '광복절', 북한에서는 '민족해방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일본에서는 염치없게도 '종전기념일'로 불린다. 그들은 패전이라는 용어 대신 '종전'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침략 전력을 은폐하고자 한다. 중국에서는 '승전기념일'로 부른다.

일왕 쇼와는 1945년 8월 14일 밤 11시 25분부터 궁내성 내정청사 2층에서 이른바 '옥음방송'을 녹음하였다. 4분 37초가 걸린 이 녹음은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로 시작되는 항복선언이지만, 최고 전범자로서 사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녹음된 방송은 이튿날인 8월 15일 정오에 발표되었다.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 이 '종전조서'는 8백 15자(字)로 구성되어서 그 배경을 살피게 한다.

8ㆍ15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는 노예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세계식민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혹독한 것이었다. 말과 글과 역사를 빼앗기고, 성씨를 비롯 전통과 문화를 박탈당하고, 인력과 자원ㆍ물산을 수탈당하는, 민족말살 바로 그것이었다. 
  
 날짜 미상. 북한 군중대회(왼쪽부터 김두봉, 김일성, 구모조 중국대표, 스티코프 소련군정청사령관)
날짜 미상. 북한 군중대회(왼쪽부터 김두봉, 김일성, 구모조 중국대표, 스티코프 소련군정청사령관) ⓒ NARA
일제에 짓밟힌 시기는 말이 36년이지, 1910년 8월 29일 국치일로부터는 만 34년 11개월 보름만이고, 1876년 2월 2일 강압에 의해 체결된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으로부터 기산하면 69년, 실질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1905년 11월 17일의 을사늑약으로 치면 40년이다.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일제와 싸우면서 해방을 준비하였다. 특히 김구ㆍ김규식 등이 주도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고 광복군을 창설하는 한편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지 이틀 후에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광복군은 미군 OSS부대와 합작하여 국내 진공의 날을 기다리며 맹훈련을 하고 있던 중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때를 놓치고 말았다. 김구 주석이 일제의 항복소식을 듣고 환호ㆍ감격 하기보다 "우리가 크게 한 일이 없는데 조국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개탄했던 것은 바로 이런 배경때문이었다. 

김구가 우려한 대로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데다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해방의 날은 왔으나 완전한 해방이 되지 못하였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고사 그대로였다.

친일부역자들에게는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봄 잠에 취해 새벽이 오는 줄도 몰랐다"고 할 것이다.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한 채 "그날이 오면"을 애타게 그리다가 젊어서 숨진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그날이 오면〉에는 모든 항일운동가와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으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한민족에게 8ㆍ15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은 통일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국강령으로 채택한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을 구현하는 민주적 삼균주의의 실천이었다.

그런데도 해방된 대한민국은 분단주의자, 친일파, 외세추종자들이 주류가 되고, 독립운동가ㆍ민족주의자ㆍ남북협상파는 암살되거나 제거되고 말았다. 변통세력이 정통세력을 짓밟고 이 땅의 주역이 된 것이다. 따라서 8ㆍ15 해방정신은 실종되고,  반 8ㆍ15 세력이 득세하는 민족모순ㆍ역사모순이 자리잡게 되었다.

해방 74주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3대 미해결의 모순이라면 △친일파 미청산 △분단 미해결 △군사독재와 그 아류 정권의 적폐 미청산이라 할 것이다. 이런 잔재들이 상호연대ㆍ연계하면서 물적ㆍ인적 축적을 통해 한국사회의 주류가 되고 세습을 하면서 역사를 오도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일 날 광화문 일대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일 날 광화문 일대 ⓒ NARA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광명이고 부활이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훼절하지 않고 광복의 날을 맞았던 소설 <임꺽정>을 썼던 홍명희는 〈눈물 섞인 노래〉를 목놓아 불렀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8ㆍ15의 해방은 온 겨레가 함께 맞이한 축복은 아니었다. 지역에 따라 달랐던 것이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해방은 8월 15일 정오의 순간에 찾아왔지만 압록강변 벽지의 시골서는 이틀이 걸렸다.

15일 저녁에 일본 경관들이 주재소의 문서를 소각하는 것을 본 시골사람들로서는 분명히 어떤 '중대한 일'이 일어난 정도로는 생각했지만 바로 그것이 일본제국의 식민지 통치의 종말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와 아버지는 굉장히 궁금해 하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하였다. 여러 가지 가능성 속에 일본의 항복과 전쟁종결도 하나의 가능성으로는 이야기되었지만 바로 15일, 경찰주재소에서 나는 연기가 그 신호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었다. …해방의 소식을 듣고도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할 뿐이었다. 서슬이 시퍼런 일본의 통치가 그렇게 어느 날 12시를 기해 딱 부러지게 끝나고, … 그런 모든 억압이 싹 걷어치워지라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해방'이 실감되지 않았다." (리영희, 『역정』)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오 남녘땅 동포들아
다시 한 번 맞이하자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내 8ㆍ15를 정말 8ㆍ15를
도금한 우리 목의 새 사슬도
마저 산산이 끊어지는 그날을. (권환)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광복#8.15해방#리영희#홍명희#한반도분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