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보훈 보상금 일부를 평생 후원 하려 하오니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차영조(76) 선생님은 제가 활동하는 '위기청소년의 좋은친구 어게인'(이하 어게인)의 최고령 후원자입니다. 선생님은 지난해 11월, 어게인이 위기청소년을 위해 경기도 부천에 만든 '소년희망센터' 개소식에 참석한 뒤 평생 후원을 약정했습니다. 제가 감동한 것은 평생 후원을 약정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암 투병으로 힘드신 데도 소외된 아이들에게 보내준 따뜻함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5년 전입니다. 설을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 과천·의왕지부 회원들과 함께 경기도 의왕의 한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나가는 말로 "오갈 곳 없는 아이들과 함께 명절을 지낸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식당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러고는 떡과 고기를 챙겨 오셔서 "아이들에게 먹이라!"고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가슴을 울컥거리게 합니다.
"나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굶기도 많이 굶고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선생님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문전걸식' 했습니다. 아이스케이크(꼬챙이를 끼워 만든 얼음과자) 장사, 여관 보이, 국밥집 배달원 등을 하며 밑바닥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어머니는 아들의 성을 차(車)씨에서 두 획을 지워 신(申) 씨로 바꿔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선생님은 왜 이런 세월을 사신 걸까요?
효창공원 임정묘역에 묻힌 동암 차리석과 백범 김구
"나에겐 두 분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혈통의 아버지는 동암이고, 정신적 아버지는 백범입니다. 백범이 아니었다면 저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아버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에서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역임한 동암(東巖) 차리석(1881~1945)입니다. 선생님은 아버지 동암과 어머니 홍매영 지사 사이에서 마지막 망명 정부 청사가 있던 중국 충칭에서 1944년 태어났습니다. 선생님이 태어날 당시 동암의 나이는 자그마치 예순넷이었습니다. 동암의 아들을 보자 백범은 "늙은 동암에게 아들이 생긴 것은 하늘의 축복"이라면서 선생님에게 '천복'(天福)이란 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상해에서 함께 살던 첫 부인(강리성)이 귀국한 뒤 혼자 지내는 동암(당시 60)을 안타까워하던 백범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던 홍매영(당시 30) 지사를 1942년 중매했습니다. 백범은 홍 지사에게 "독립 운동가를 곁에서 도와주는 것도 독립운동이다"라며 결혼을 권유했습니다. 선생님이 백범을 정신의 아버지로 삼은 가장 큰 이유는 백범의 중매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백범의 말씀처럼 선생님은 하늘의 축복으로 태어났지만 삶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을 탄압하는 조국에서 죄인처럼 숨어 살면서 성까지 바꿔야 했으니까요. 백범이 흉탄에 쓰러지는 등 독립운동가에 대한 테러와 탄압이 극심해지자 홍 지사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성을 바꾸었습니다.
동암은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정 27년을 지키면서 백범이 독립운동의 거목이 되도록 뒷바라지했습니다. 하지만 임정의 환국을 준비하던 1945년 9월 9일 과로사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충칭에 묻혔던 동암의 유해는 백범의 특별지시로 1948년 8월 석오(石吾) 이동녕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효창공원 임정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이후 동지를 먼저 보낸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흉탄에 쓰러지면서 동암 곁에 누웠습니다.
왼손엔 문재인 대통령 시계, 오른손엔 노무현 대통령 시계
아버지를 잃은 선생님은 어머니 품에 안겨 1946년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의 유족이라면, 그것도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나섰다면 마땅히 환대받아야 했지만, 돌아온 것은 지독한 가난과 병고였습니다. 서른아홉에 어머니를 잃은 선생님은 한전 검침원으로 일하다 중동과 아프리카 나이지리아까지 가서 건설노동자로 일했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2007년 위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마음에서 병이 왔습니다. 일제가 물러갔는데도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을 보면서 울분이 쌓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법통인 임정을 훼손하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왜곡하는 친일파 세상에 절망한 것입니다. 그랬던 선생님이 병든 몸을 일으켰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나라가 나라다워지고 있다며 기뻐하셨습니다.
"친일을 청산하고 독립운동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는 출발입니다. 이제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넘어 새로운 100년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100년을 다짐하고 열어갈 역량이 우리 안에 있다는 자긍심과 자신감으로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어갑시다."
문재인 대통령이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26일 동암과 백범이 계신 효창공원을 찾아 '새로운 100년'을 천명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선생님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친일파가 묻힌 현충원을 찾던 역대 대통령과 달리 임정 요인이 잠든 효창공원을 찾아와 친일청산을 다짐하는 것을 보면서 "아, 친일로 얼룩진 이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로 거듭나고 있구나"라며 감격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왼쪽 손목에 문재인 대통령 시계, 오른쪽 손목에 노무현 대통령 시계를 차고 다닙니다. 아이들처럼 손목시계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런 자랑을 유치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아버지로 인해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아들의 역사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에게 두 대통령의 시계는 역사의 시계입니다. 역사의 시계가 비로소 바르게 돌아가기 때문에 자랑하는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보내준 시계를 양쪽 손목에 차고 다니는 것은 임정의 법통과 독립운동을 잇는 역사의 시계이기 때문입니다. 반역의 시계인 이명박과 박근혜의 시계는 역사를 거꾸로 돌렸기 때문에 거부했지만 두 대통령이 보내준 역사의 시계는 바르게 가고 있기에 차고 다니면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임정의 막내로 태어난 저는 죽을 때까지 이 시계가 멈추지 않도록 시계 밥인 배터리를 잘 챙길 것입니다."
"동암·백범 아버님, 이 나라를 굽어 살펴주십시오!"
동암의 가문은 가족의 안위를 버리고 오직 조국 독립에 헌신한 명문 독립운동가 가문입니다. 아버지 차리석(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작은아버지 차정석(2017년 대통령 표창), 고모 차보석(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 어머니 홍매영(2018년 건국포장) 지사까지 모두 네 명의 지사를 배출했습니다. 그러나 동암의 유일한 자녀는 차영조 선생님 한 분입니다. 차정석과 차보석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동암의 첫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차애련, 차영희)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일파가 떵떵거리는 이 나라에서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바로 서면서 그 아픔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머니와 고모의 훈장을 들고 동암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가슴 벅찬 눈물을 바치는 한편,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감내해야만 했던 부끄러움 또한 돌이켰습니다. 애국선열의 명예가 무참히 짓밟히는데도 후손으로서 바로 잡지 못한 부끄러움입니다.
병든 노구를 이끌고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서 당해야 했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선생님에게 촛불혁명은 이 시대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마침내 임정의 법통을 잇는 정권이 들어서면서 임정 100주년 기념사업이 전개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예우하는 등 독립운동이 제대로 조명되는 것을 보면서 선생님은 감격의 세월을 보내십니다.
감격의 마음으로 임정 100주년을 맞이한 선생님은 요즘 편치 않습니다. 친일 세력의 거친 준동 때문입니다.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방해하면서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책동에 분노하셨습니다. 최근 선생님은 임정 묘역을 찾아 동암, 백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이동녕, 조성환 등 효창원 7위 선열을 성묘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친일 반민족 세력에게 짓밟힌 독립운동 선열의 명예가 문재인 정부를 통해 회복되고 있지만, 친일 세력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 있습니다. 두려운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친일 세력이 임정의 정통성을 뒤흔들며 민족의 앞날을 망가뜨린 과거로 회귀하지 않도록 7위 선열이여, 이 나라를 굽이 살펴주소서."
"제가 낸 후원금이 아니라 동암이 낸 후원금입니다!"
독립운동가 후손 중에 선친의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친일 반민족 세력 품에 안겨 부귀영화를 누린 후손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버지를 팔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완장질을 하거나 거들먹거린 적도 없습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근검절약하며 살았습니다.
선생님의 형편은 넉넉한 편이 아닙니다. 굶주림의 고통을 알기에 쌀 한 톨도 아끼며 사십니다. 한 푼 두 푼 아낀 돈으로, 나라 안과 밖의 배고픈 아이들을 후원하고 계십니다. 굶는 고통을 뼈저리게 겪으셨기 때문에 굶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선생님은 TV에 나온 굶주린 아프리카 아기를 본 후 10년이 넘게 후원을 하셨습니다. 선생님 덕분인지 아기는 건장한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을 가슴 벅차게 맞이할 선생님은 "이 시대의 독립운동은 따뜻한 세상 만들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독립운동은 나만 잘 살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운동이었다. 친일파는 떵떵거리며 살고 가난한 사람은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나라는 동암이 원하던 나라가 아니다. 내가 낸 후원금은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 동암의 후원금"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나라와 아프리카의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후원하는 돈은 내 돈이 아니라 아버님이 내시는 후원금입니다. 나는 애국한 것도 없는데 아버님 덕분에 보훈 보상금을 받고 있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버님이 살아 계신다면 굶주리는 아이들을 외면하는 세상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동암 선생님도 작은 후원금을 통해 그늘졌던 아이들이 웃음 짓는 것을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 차영조 선생님의 소망은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 그리고, 위기 청소년들도 '우리나라 만세'라고 외치는 따뜻한 나라입니다. 따뜻한 손과 정의로운 손을 맞잡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전진하길 원하는 선생님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빌면서 임정 100주년에 띄우는 소망 편지를 마칩니다.
덧붙이는 글 | 조호진 기자는 <위기청소년의 좋은친구 어게인> 활동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