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와 흙'은 25일간 멕시코의 도예마을을 따라 여행한 기록을 담았다. 3년 전 칠레의 한 도예마을에서 보았던 글귀를 기억한다. "도예는 땅의 꿈에 형상을 입혀주는 인류의 유일한 예술이다" 멕시코에서 만난 흙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 그들이 만들어낸 흙 예술을 통해 만나보았다. - 기자말
일상에서나 여행에서나 지인 찬스는 중요한 법이다. 2년 전 한국에서 알게 된 멕시코 친구가 소개해 준 와하까에 사는 예술가 친구 엠마(Emma)가 그 찬스였다. 최근 흙을 재료로 한 조형작업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그 덕에 현지 도예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와하까에 도착했을 때 엠마는 시내 외곽 마을에서 열리는 도예 워크숍에 참가하고 있었고, 워크숍이 끝날 즈음 그 곳에서 알게 되었다는 도예가 한 명을 꼭 만나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 함께 시간을 내어 도예가의 작업실로 찾아갔다.
엠마가 추천해준 도예가는 루피나 루이스 로페즈(Rufina Ruiz Lopez, 아래 루피)였고 루피를 만나러 간 마을, 산타 마리아 아트솜파(Santa maria atzompa, 아래 아트솜파)는 와하까 주의 대표적인 도자기 마을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도자기를 만들어온 이 마을은 아직도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이 도자기를 빚으며 살아간다. '초록 흙'의 마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데, 물론 흙색이 초록색이라는 건 아니고, 초록빛 유약의 도자기를 만드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초록도자기의 마을 '아트솜파'
늦은 오후에 잡힌 루피와의 약속 시간 전에 먼저 마을에 도착해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자기 마을 답게 초입에는 도자기 마켓 건물이 있었다. 건물로 보아서는 최근에 지어진 것처럼 보였는데 이미 25년 동안 있던 곳이고 최근 리모델링되었다고 했다.
"마을의 크고 작은 공방 모두 이곳에 자신의 도자기를 진열하고 판매할 수 있어요. 이곳에서 팔린 도자기는 어느 공방의 것인지 기록이 되고 매일 저녁 정산을 해 줍니다."
백 여개가 넘는 마을 공방의 도자기들이 각 구획별로 진열되어 있고 진열대에 공방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다. 직접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도자기를 구입할 수도 있고 더 보고 싶으면 주소를 찾아 직접 마을 공방에 방문할 수도 있으니 마켓이면서 마을 도자기 홍보관 같은 곳이었다.
마켓을 나와 동네를 걷다보니 도자기 가게들에는 여전히 동네 분들이 필요한 그릇을 구매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자기를 만드는 이웃에게 또 다른 이웃이 필요한 도자기를 구매하는 자연스러운 마을 순환 경제의 모습이 반갑기도 했다.
"흙에서 나서, 자랐죠" 아트솜파 도예가 루피
약속시간에 맞춰 마을에 도착한 엠마와 주소를 찾아 도착한 곳엔 별다른 간판이 없는 그냥 너른 마당의 담장 높은 집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루피'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리니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맨발의 한 여성이 반갑게 얼굴을 내밀었다. 루피였다.
거침없이 맨발로 흙바닥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앉을 틈도 없이 작업실 곳곳으로의 탐험이 시작되었다. 마당 가운데 오래된 전통흙가마가 있고 작업실 안에는 몇년 전 지역 도예가가 개발해서 만들었다는 얼핏 보기에는 무슨 용광로 같은 모양의 거대한 가스 가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최근 하고 있는 작업이며 테스트 중인 것들을 쉬지 않고 이야기하며 작업장을 누비는 루피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엠마가 루피를 소개할 때 '전통과 혁신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겁없는 이 지역 대표적인 도예가'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되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흙으로 사신 분들이죠. 어려운 삶을 흙 덕분에 이겨나갈 수 있었다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한 번도 직업으로 도자기를 배운 적은 없었죠. 그 시절 흙을 만지는 사람들이 그랬듯 어머니에게 도자기는 삶으로 배워진 어떤 것이었어요. 저에게는 그런 그녀의 삶이 가장 큰 본이 됩니다."
루피가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시작한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흙 작업을 하는 어머니 옆에 앉아 이미 흙을 반죽하고, 모양을 만들었다. 그녀 역시 모든 흙 작업을 그렇게 삶으로 배웠다. 그렇기에 '흙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서, 흙과 함께 살아간 것'이 자신에게는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전통을 이어가는 자리에서 머물지 않았다.
몇 년 전 디자인 관련 학과와 연계된 학위 과정을 수료하면서 루피는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때 루피가 작업한 것이 멕시코의 다른 도시 뿐아니라 미국 , 벨기에 등에 알려지고 초대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루피의 공방을 찾아 아트솜파를 방문하고 도자기 워크숍을 요청하기도 한다.
"전통적 필요와 현대적 디자인을 담으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전통과 혁신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흙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죠."
'전통을 담고 변해가는 새로움'을 강조하는 루피에게 어떤 것이 새로운 것 안에 끝까지 담겨질 전통인지를 물었다. 그녀는 대답대신 수년간 작업해 온 그녀의 오래된 작업실 자리에 앉았다.
그냥 종이 한 장을 꺼내 낙서하듯 가볍게 흙 한줌을 쥐고 이내 작업 모드로 전환하는 그녀의 가벼움에 놀랐다. 어머니 때부터 사용했다는 오래된 단지를 엎어놓고 그 위에 작은 타일 하나를 올려 판을 돌리는 '단지 물레'가 휘휘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형태와 도자기에 입혀질 색은 변하겠지만 그녀의 할머니가, 어머니가, 그리고 지금은 그녀가 흙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이 순간은 변하지 않을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두드리고, 반죽하고, 모양을 만들고, 태우는 과정 안에서 흙은 무언가 더 나은 어떤 것에 도달하기 위해 살아가죠. 마치 인생과 같아요. 그 삶 안에서 흙도 인간이 고통받는 것처럼 고통받아요. 인간처럼 흙은 느끼고 살아가는 존재예요. 그래서 저는 흙을 존중합니다."
루피는 올해 말, 아트솜파 도자기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를 맡게 되었단다. 고대 도자기부터 가까운 과거,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향한 걸음까지를 아우르게 될 전시라고. 그 자료를 모으고 작품을 만들고 재현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공이 들어갈 작업이지만 꼭 해보고 싶던 작업이라며 조금 들떠 있었다. 나 역시 그녀에게 참 어울리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루피의 단지 물레를 살짝 빌려 앉아 그녀의 방식대로 물레를 돌려보았다. 전혀 내 맘처럼 움직이지 않은 지지대에 곤욕을 치르며 흙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요즘 배우고 있다는 전기 물레가 어렵다던 그녀에게 "이 물레를 돌릴 줄 아는데 전기 물레가 무엇이 어렵냐?"며 웃었다. 각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 결국 새로운 것인 법이다. 나에게는 루피의 단지 물레가 2019년에 만난 신문명인 날이었다.
지극히 전통적인, 혹은 지극히 혁신적인 루피의 걸음 사이를 보며, 전통과 현대적인 것의 경계는 루피의 단지 물레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리저리 균형을 맞추며 움직이는 흙처럼 그렇게 돌고 돌아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