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
ⓛ편에서 이어집니다.
김중업이라는 거장의 작품으로 기억될 이 도서관이 뜻하지 않게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바로 '건대사태', '애학투련' 사건으로 알려진 '10.28 건대항쟁' 때문이다.
1986년 애학투련 결성과 경찰의 강제 진압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 정권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한다. 이 조치를 통해 100명 가까운 해직 교수와 1300여 명의 제적 학생이 학교로 돌아오고, 캠퍼스에 상주하던 경찰 병력이 철수한다. 학원자율화 조치 발표 후 1984년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1985년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이 탄생하는 등 학생운동은 활기를 찾는다. 이 시기 학생운동은 몇몇 대학이 주도하고 비밀 지하조직 형태로 운영되는 한계를 지녔다.
1986년 10월 28일 전국 27개 대학 2천여 명 학생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을 출범시킨다. 애학투련은 노선과 조직이 흩어져 있는 학생운동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만들었다.
애학투련 출범 장소로 건국대학교를 결정한 이유는 뭘까? 애초 집회를 하려 한 연세대를 경찰이 사전에 막았고, 건국대 캠퍼스가 평지면서 출입구가 많아 외부 학생이 쉽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흘 밤 나흘 낮 이어진 항쟁
한편 전두환 정권은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직선제를 지지하는 민심이 크게 일자 반대 세력을 뿌리 뽑고 정권을 연장하려 한다. 박철언이 증언한 것처럼 전두환은 국회 해산과 비상계엄령을 포함한 '친위 쿠데타'를 구상한다. 1986년 5.3 인천사태 때부터 공안정국으로 전환한 전두환 정권은 건국대 집회를 학생운동 일망타진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일본 학생운동의 전환점이 된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건처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당국은 대학생 집회를 사전에 봉쇄했는데, 행사 당일 건국대에는 전투경찰을 대규모로 배치했을 뿐 검문검색을 하지 않았다.
10월 28일 오후 애학투련 결성식이 끝나자마자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강제 몰이를 시작한다. 진압을 피해 학생들은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현 언어교육원), 대학본관(현 행정관), 사회과학관(현 경영관), 학생회관, 교양학관(현 법학관) 5개 건물로 흩어졌다. 건국대의 경찰 철수 요청과 시위 학생 측의 자진 해산 요구를 경찰은 거부한다. 경찰의 '계획된' 진압으로 '계획에 없던' 3박 4일간의 점거 농성이 시작되었다. 농성 학생의 30%인 465명은 여학생이었다.
여러 건물에 시위대를 강제 몰이한 경찰은 전기와 물을 끊고, 언론을 통해 '공산혁명분자의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이라며 시위 학생을 용공세력으로 몰아갔다. 첫눈까지 내린 때 이른 추위 속에 '사흘 밤 나흘 낮'에 걸쳐 점거 농성은 이어지지만, 10월 31일 아침 경찰은 강제 진압을 시작한다.
학생 시위 진압 과정에 최초로 헬기를 동원하고, 소방차 30대, 연인원 1만8900명의 전투경찰을 진압에 투입한다('황소 30'이라는 작전명으로 건대 시위 진압을 지휘한 경찰 책임자는, 박종철 군 사망 발표 때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말을 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학생 53명이 부상과 화상을 입고 모든 시위 학생이 연행된다. 학생 농성과 경찰 진압 과정에서 건국대는 23억5천만 원의 손실을 입었다.
경찰은 연행 학생 1525명 중 무려 1288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구속한다. 한국 학생운동사상 최대 공안사건이며 해방 이후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구속자를 낸 사건이다. 최다 인원 농성, 최악의 진압 방식, 최대 구속자를 낸 건대항쟁은 세계 학생운동사에서도 드문 사건이다. 사건 직후 정부와 언론은 '공산분자들이 뿌리 뽑혀 더 이상 캠퍼스에서의 소요는 없을 것'이라며 학생운동의 종말과 학원의 안정을 단언했다.
지성의 전당이자 대학의 심장이 초토화된 사건
3박 4일간 농성이 있던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현 언어교육원)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중앙도서관으로 피신한 150여 명의 학생은 경찰 진입을 막기 위해 도서관에 있던 책상과 의자, 목록함을 바리케이드로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도서관의 소중한 자산인 목록 훼손을 피하기 위해 목록함 서랍을 따로 빼서 안전한 장소에 따로 보관한다. 당시 도서관에는 40만 권의 장서가 있었는데, 경찰과 대치 과정에서 농성 학생은 도서관 장서를 훼손하거나 불태우지 않았다. 건국대 도서관 장서가 '분서'(焚書)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다.
시위와 상관없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건국대 학생 중 상당수가 도서관과 다른 학교 학생을 지키기 위해 함께 남았다. 도서관 농성 학생들은 돈을 모아 자판기에서 컵라면과 초코파이를 뽑고 옥상 물탱크에 있던 물로 굶주림과 목마름을 달래며 버틴다. 도서관 옥상에서 돌에 줄을 매달아 대학본관으로 던져 건물 사이를 연결, 도서관에 있던 먹을거리를 본관 시위대와 나누기도 했다. 농성하던 학생은 도서관에 이런 벽서를 남겼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은 10월 31일 아침 9시 경찰이 가장 먼저 진압을 시작한 곳이다. 당시 도서관에는 사회과학관과 대학본관 다음으로 농성 학생이 많았다. 경찰이 동원한 헬기 2대가 사과탄과 소이탄을 터뜨리고 고가 사다리차로 최루액을 뿌리면서 전투경찰의 진압이 이뤄지고 도서관에 있던 시위 학생은 전원 연행된다. 농성과 진압 과정에서 도서관 유리창이 200장 넘게 깨지고 서가가 쓰러지면서 일부 장서가 훼손되기도 한다. 도서관의 핵심인 장서가 불타진 않았으나 건물 곳곳이 파손되는 걸 피할 순 없었다.
66시간 50분 동안 이어진 점거 농성과 헬기까지 동원된 진압으로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은 말 그대로 '초토화'된다. 군사정부 시절 경찰이 도서관에 상주하거나 도서관에서 학생을 강제 연행한 일은 드물지 않았으나 헬기까지 동원,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진압이 도서관과 캠퍼스에서 펼쳐진 건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다사다난했던 한국 현대사에서 지성의 전당이자 대학의 심장인 대학도서관이 경찰 진압에 의해 초토화된 사건은 10.28 건대항쟁과 1989년 5월 3일에 일어난 부산 동의대 사건이 유이(唯二)할 것이다.
뜨거운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될 도서관
전두환 정권 의도대로 학생운동 세력은 '일망타진'되지만, 10.28 건대항쟁은 의도치 않게 학생운동이 대중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대규모 검거로 지하 서클 위주로 활동하던 학생이 대거 구속되자, 학생운동은 학생회 중심의 대중노선으로 전환한다.
일망타진으로 인한 정권의 자신감이 지나쳤던 걸까. 10.28 건대항쟁으로부터 75일 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고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건대항쟁이 끝나고 7개월 후 우리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맞는다.
건국대학교 언어교육원은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김중업이 설계한, 흔치 않은 도서관이다. 인권은 물론 생명까지 앗아가는 군사정부 시절 그의 도서관도 큰 시련을 겪지만 반세기 넘게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사회적 발언을 이어간 현실 참여형 건축가의 작품이기 때문일까. 그가 설계한 '도서관'은 한국 현대사 뜨거운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건국대학교 언어교육원]
- 주소 : 서울시 광진구 능동로 120 건국대학교 내
- 이용시간 : 평일 09:00 - 21:00
- 휴관일 : 매주 주말
- 이용자격 : 일반 시민에게 개방
- 홈페이지 :
https://kfli.konkuk.ac.kr
- 전화 : 02-450-3075-6
- 운영기관 : 건국대학교
덧붙이는 글 | 건축가 김중업이 남긴 ‘도서관’과 10.28 건대항쟁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