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초반, 박근혜 대통령이 김학의 검사장의 성범죄 동영상을 무시하고 법무부 차관 임명을 강행한 배경에 두 집안의 친분이 있었다는 <노컷뉴스>(4월 1일 보도) 보도가 있었다.
<노컷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육군 대령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은 김학의 전 차관의 아버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관 출신으로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 등장 전에 이미 두 집안의 인연이 형성돼 있었다는 것. 이런 인연이 박근혜(1952년생)와 김학의(1956년생)의 친분으로까지 이어졌다는 내용이다.
이 매체는 2013년 당시의 김학의 조사 과정에 정통한 수사당국 핵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박 전 대통령과 김 전 차관이 어릴 적 청와대 동산에서 함께 뛰어놀던 사이라는 진술이 여러 번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라며 "그만큼 가깝고 오래된 관계였다"라고 설명했다.
"가깝고 오래된 관계"... 수사당국 관계자의 말
"김 전 차관의 6촌 누나와 박 전 대통령은 목욕탕도 같이 다니고, 취임식에 어떤 옷을 입을지 의논할 정도로 친하다"라며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김 전 차관을 진짜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정치권 인사의 언급도 있었다고 이 매체는 보도했다.
유사한 의혹이 2013년에도 제기됐다. 하지만, 2013년 3월 21일 <한겨레>에 보도된 것처럼 김 전 차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과도 직접적인 인연이 없다"라면서 두 집안의 관계를 부인한 바 있다.
김학의 동영상 의혹은 2013년 당시엔 박근혜 정권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훼손하는 기능을 했고, 2019년 지금은 이미 붕괴된 박 정권의 이미지를 한층 더 짓밟는 기능을 하고 있다. 두 집안의 인연이 박근혜 정권과 그 관련자들의 이미지를 철저히 파괴하는 쪽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찍 몽골에 항복한 고려 사령관
오래도록 이어진 가문 간의 인연이 세간의 관심을 받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당대 역사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친 사례들은 과거에 훨씬 더 많다. 과거엔 가문을 단위로 정치·경제·사회·교육 활동이 이뤄졌으므로 가문간 인연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김학의 인연처럼 정권의 이미지나 명운에까지 파급력을 미친 사례들이 적지 않다.
몽골(원나라)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 당시, 고려인들은 약 40년간 몽골에 맞서 항쟁했다. 그 시기에 그 누구보다 먼저 친(親)몽골의 기치를 높이 내건 가문이 있다. 지금은 평안도 의주인 인주(麟州) 땅에서 세력을 갖고 있던 홍복원 가문이 바로 그들이다.
이 가문이 시세에 얼마나 민첩하게 대응했는가는 몽골의 제1차 고려 침공(1231년) 전에 이미 몽골에 항복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몽골군이 거란군을 추격하다가 고려 국경을 넘은 1218년, 홍복원의 아버지이자 인주도령(인주 사령관)인 홍대순은 일찌감치 몽골에 항복을 표시했다.
<고려사> '홍복원 열전'은 "고종 5년에 원나라에서 합진찰랄을 보내 거란 군대를 강동성에서 공격할 때 홍대순이 마중나가 항복"했다고 전한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한 것도 아닌데, 일찌감치 몽골을 주군으로 모셨던 것이다.
홍복원이 항복할 당시의 몽골 칸(군주)은 칭기즈칸(재위 1206~1227)이었다. 몽골은 칭기즈칸의 셋째아들인 우구데이가 칸으로 재위할 당시인 1231년부터 고려를 계속 침공했다. 고려에 대한 몽골의 적대적 태도가 공식화되던 이 해부터 홍씨 가문도 적극성을 보였다. 홍대순의 아들 홍복원이 일찌감치 투항을 결정했던 것이다. 홍복원 열전은 이렇게 말한다.
"(고종 18년에) 살례탑(살리타이)이 대거 침입했을 때 홍복원이 마중나가 그 군대에 항복했다."
홍대순과 홍복원은 공통점이 있다. 몽골군이 접근해오자, 미리 '마중나가 항복(迎降)'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민첩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 가문은 동족들의 가슴에 피멍도 들게 했다. 이 일은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가 주도했다.
고려 왕실과 몽골 황실이 화친한 뒤인 1271년, 홍다구는 일가친척을 거느리고 진도에 들어가 삼별초 진압 작전을 벌였다. 고려인들이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도록 싹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홍다구는 그 다음 해에는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문제를 갖고 고려와 몽골을 이간해서 고려 조정을 괴롭혔다.
홍복원 열전에 따르면, 일본 선박이 남해안에 일시 정박하자 고려 지방관이 은밀히 연락해 퇴거를 요청한 일이 있다. 몽골이 의심할 수도 있으니 빨리 돌아가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첩보를 알아낸 홍복원은 고려와 일본의 내통 증거라며 당시 몽골 군주인 쿠빌라이칸(원나라 세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홍씨 가문-몽골 황실 인연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손자다. 홍대선 때부터 형성된 몽골 황실과의 인연이 홍대선의 손자 홍다구와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때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배경으로 홍다구는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적 입지를 넓혀갔다.
홍씨 가문과 몽골 황실의 대를 이은 인연은 몽골이 고려를 견제하는 데 활용됐다. 또 요동(만주)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몽골 정부가 통제하는 데도 홍씨 가문이 앞장서 나섰다. 몽골이 일본 원정을 추진할 때도 이 가문이 적극 협력했다. 두 집안의 인연이 몽골과 고려·요동·일본의 관계에 파급력을 끼쳤던 것이다.
이 같은 홍씨 가문에 대해 고려인들은 증오심을 품었다. 이 가문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 '반역 열전' 편에 수록된 내용만 봐도 그런 반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정서는 몽골에 대한 고려인들의 저항심을 축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몽골의 패권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홍다구(1291년 사망)가 살아 있을 당시만 해도 몽골의 국력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그 같은 반감이 몽골의 패권에 큰 지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홍씨 집안과 몽골 황실의 인연에 대한 반감은 이 땅에서 몽골의 패권을 조금씩이나마 허물어 트리는 데는 분명히 일조했다.
몰락 직전 몽골과 기씨 집안의 인연
홍씨 집안처럼 가문 차원에서 몽골 황실과 인연을 맺은 또 다른 집안이 있다. 기황후와 기철로 대표되는 기씨 집안이 바로 그들이다. 기씨 집안도 몽골 황실의 실권을 장악한 공녀 출신 기황후를 앞세워 고려 안에서 권력을 구축했다.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은 몽골 황실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고려 조정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남의 토지를 빼앗는 악행까지도 서슴없이 자행했다.
기씨 집안은 고려 왕실을 무시하고 인사권에도 개입하려 했다. 기황후는 다루기 힘든 공민왕을 몰아내고 허수아비 덕흥군을 앉히고자 1364년 1만 군대를 보내 고려를 침공했다. 하지만 고려 명장들인 최영·이성계의 방어에 막혀 덕흥군 임명을 철회해야 했다.
기씨 집안과 몽골 황실이 인연을 맺은 시기는 몽골의 패권이 급격히 쇠퇴하던 때였다. 이 시기에 두 집안의 인연은 고려에 대한 몽골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반(反)몽골 세력을 견제하는 데 활용됐다.
하지만, 홍씨 집안에 비해 기씨 집안은 불리했다. 홍씨 집안은 전성기의 몽골과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동족들의 원성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고 부귀영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반면, 기씨 집안은 몰락 직전의 몽골과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동족들의 원성이 이 가문의 명운에 영향을 주게 됐다.
기철은 1356년 공민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동맹국인 고려에서 친몽골 세력이 몰락한 사건은 몽골의 동아시아 패권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몽골은 중국 농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급격히 쇠락하다가 1368년 몽골초원으로 도주해야 했다. 이때 기황후는 몽골 칸인 아들과 함께 북쪽으로 도주했다.
당시 실권자가 기황후였으므로 몽골 황실은 결국 기씨 때문에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철이 고려에서 몰락한 데 이어 기황후마저 몽골 황실을 지키지 못한 것이 이 세계제국의 명운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기씨 가문과 몽골 황실의 인연이 몽골제국 몰락을 조장한 측면은 부인되기 어려울 것이다.
김학의 집안과 박근혜의 집안의 인연은 촛불혁명 발생 3년 전에 박근혜가 김학의의 법무부 차관 임명을 강행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박-김 두 집안의 인연이 대를 이어가며 유지됐다는 점에서는 홍씨 가문 사례와 유사하지만, 정치적 격동기에 정권의 명운에까지 영향을 줬다는 점을 보면 기씨 가문 사례와 유사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