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가끔 반동기를 겪는다.
프랑스혁명 등이 그랬고 한국현대사도 다르지 않았다. '서울의 봄'을 짓밟고 광주에서 피바다를 이루면서 전두환이 등극하였다.
연대기적으로 제5공화국, 전두환 시대는 박정희의 유신시대에 못지않는, 그보다 더 포악하고 잔혹한 무단통치 시대였다. 다시 민주주의는 실종되고 1인독재가 자행되었다.
'서울의 봄'과 함께 소생하던 언론자유는 다시 어용논객들의 전성시대가 되고, 야당의 존재는 허울뿐이었으며, 사법부는 시녀가 되었다. 미국이 5공정권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미문화원이 화염에 쌓이고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돌연' 사임했다.
여기서 '돌연'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헌법규정에 따라 박충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박 대행은 특별담화에서 "국가원수의 궐위기간을 최소한으로 단축시킴으로써 영도자의 공백에서 오는 혼란과 국가기능 정체를 막는 일이 정부가 해야 할 급선무"라고 밝혔다.
최 대통령의 사임 후 11일 만인 8월 27일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제7차 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선거는 단일후보인 전두환 후보가 2,524표를 얻어 99.9%의 득표율로 11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아무리 폭압의 시대라고 해도 99.9%의 득표율이란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전 대통령은 이날 낮 당선통지서를 받은 뒤 <당선에 즈음한 담화>를 발표 "국정운영에 있어 항상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정직하고 능률적인 정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고 "새역사 창조를 위한 제반과업을 과감히 계속 추진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전두환은 이미 9월 29일 정부의 개헌심의위원회가 성안한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선출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했으며, 10월 22일 이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새 헌법안은 우리 나라 투표사상 최고율인 95.5%의 투표율과 91.6%의 찬성률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10월 27일 공포되었다. 국민투표 과정에서 '선거계도'라는 구실로 행정력이 총동원되고 심지어 입원 중인 환자들까지도 투표에 동원하는 등 전례 드문 부정이 저질러졌다.
제8차 개헌에 해당되는 이 헌법의 주요 내용은 ① 전문에서 '4ㆍ19의거'와 '5ㆍ16혁명' 이념계승을 삭제하고 '3ㆍ1운동' 정신계승 및 제5공화국 출범을 명기했으며 ② 국가의 정당보조금 지급조항을 신설하고 ③ 기본권의 개별유보 조항 삭제, 연좌제 금지 ④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 및 7년 단임제 ⑤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채택 ⑥ 통일주체국민회의 폐지 등이다.
전두환의 목표는 보궐선거를 통한 임시 대통령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선거는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2월 25일 실시되었다. 대통령후보는 민정당의 전두환, 민한당의 유치송, 국민당의 김종철, 민권당의 김의택 총재가 각각 입후보하여 총선거인 5,277명 중 5,271명이 투표에 참가, 전두환 후보가 4,755표를 얻어 90.2%의 다수표로 당선이 결정되었다.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은 3월 3일 임기 7년의 제12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 제5공화국 정부를 출범시켰다. '역사상 가장 오랜 쿠데타'로 일컬어지는 12ㆍ12로부터 1년 3개월여 만이고, 5ㆍ17로부터는 10개월여 만에 마침내 대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전두환은 3일 오전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내외인사 9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통해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시련과 고뇌의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제5공화국의 출범으로 자기완성 시대를 형성하여야 할 성장과 성숙의 시대에 들어서는 찰나에 있다"고 말하고, 그동안 모든 국민이 갈망해온 '전쟁위협'과 '빈곤', '정치적 탄압과 권력남용' 등 세 가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다짐했다.
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과 그 일당은 '권력남용'을 통해 인권을 유린하고, 천문학적인 축재를 했다가 훗날 폭로되었다. 전두환 세력이 만든 정당의 이름이 '민주정의당'이었다. 반민주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무리가 '민주'와 '정의'의 고귀한 용어까지 훼손한 것이다.
전두환은 이미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의 과도기간 동안에 민간정치인들을 철저히 규제하여 정치활동을 봉쇄하고,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라 하여 김대중을 비롯, 문익환ㆍ이문영ㆍ예춘호ㆍ고은ㆍ김상현ㆍ이해찬 등을 투옥했으며,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바꿔서 정치ㆍ사회ㆍ언론ㆍ노동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사찰을 강화시키고, 언론기본법을 제정하고 언론통폐합을 단행하여 반정부적인 언론인을 대대적으로 숙정, 711명의 해직사태를 빚는 등 언론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또한 노동관계법, 즉 기존의 근로기준법ㆍ노동조합법ㆍ노동쟁의조정법ㆍ노동위원회법에 새로이 노사협의회법을 만들어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설정, 외부의 지원이나 연대를 차단시키고, 노동조합에 대한 행정관청의 간섭을 합법화했으며, 쟁의행위를 규제하는 복잡한 절차를 만들어 단체행동권을 크게 제한하는 등 노동운동을 심하게 탄압했다.
또한 국가보안법을 크게 강화시켜 인권탄압을 가중시킨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반공법을 폐지함과 동시에 이를 국가보안법에 흡수시켰는데, 반국가단체의 애매한 규정 등 제정 당시부터 악용될 소지를 안고 있던 이 법은 전두환 체제 출범 이후 각종 조직사건을 비롯,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어 '정권보안법'이라 불릴 만큼 지탄받았다.
전두환 체제는 12ㆍ12의 하극상으로부터 출발하여 광주 민주시민 학살의 피 묻은 손으로 정권을 빼앗아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향후 7년 동안 무소불위의 전횡과 부패, 인권유린을 자행하였다.
'땡전뉴스'로 상징하는 어용언론인들과, 검찰ㆍ법조인ㆍ정치인ㆍ사이비 지식인들이 정권의 '호위무사' 노릇을 충실히 수행했다.
광주학살과 헌정유린, 반민주 5공정권에 협조한 정치인ㆍ문화인ㆍ언론인ㆍ법조인 등 '부역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누군가 나서 그들의 실상을 정리했으면 싶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