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겠단 건 다시 돌아오겠단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굳이 여행까지 가서 글을 쓰겠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 여행기의 의미는 어느 졸업예정자, 취준생, 여자, 집순이, '혼행러', 그리고 채식주의자가 먹방부터 감성까지 여행에서의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담아 돌아오겠단 거창한 선언에 있다. -기자말
인도로 떠나기 전, 먼저 여행을 다녀왔던 두 친구에게 물었다. "어디가 제일 좋았어?" 두 친구가 하나같이 꼽았던 곳이 있다. 인도에서 가장 무거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 '함피'다.
이토록 무겁고 찬란한 폐허
함피에 도착하니 오후 다섯 시 경이 됐다. 숙소에 짐을 두고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려던 차에, 운이 좋게도 릭샤(인도의 택시)를 타고 일몰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사원에 도착하자 그 뒤편에 있는 바위와 돌 너머로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구름에 가려 일몰을 볼 수는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그 빛과 빛이 번진 하늘, 하늘을 내리누르는 듯한 바윗덩어리들의 풍경은 그 자체로 충분했다. '세상에 다신 없을 곳'이었다.
함피의 역사는 찬란하다. 14~16세기에 걸쳐 함피에 뿌리를 내린 무슬림 왕조는 화려한 영광을 이룩했다. 왕과 신하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는 궁은 해와 맞닿아 눈이 부셨고, 왕비의 목욕탕이었던 '퀸즈배스'엔 한낮에도 냉기가 느껴졌다.
모든 것이 거대하고 단단했다. 한편, 돌기둥 곳곳에 새겨진 조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섬세하고 다채롭다. 거대함에 눈을 두다 섬세함에 시선을 뺏기고, 이 둘의 조화에 결국 걸음을 멈추고 마는 장소다.
16세기, 이슬람 왕조와의 전쟁으로 화려했던 함피의 역사는 폐허로 남았다. 지붕은 무너졌고, 기둥은 부서졌다. 향신료 거래로 북새통을 이뤘다던 장터의 활기는 간데없다. 거대했던 돌의 제국을 서서히 무너뜨린 것은 수백 년에 걸친 풍화이기도 했다. 함피는 이제 왕국이 아닌 잔해로 남은 유적이다.
허나 돌들의 폐허만 남은 이곳에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아오고 일주일, 한 달을 이곳에 머무는 것은, 그 아름다움만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천, 수만 개의 돌로 둘러 싸인 함피엔 그 돌들이 수 세기 동안 조용히 짓눌러 만들어 낸 거대한 아름다움이 있다. 모래와 돌의 시간, 인도의 또 한 면을 발견한 날들이었다.
함피에선 로맨스를
어디서나 보이는 비루픽샤 사원의 웅대한 분위기가 마을에까지 미친 탓일까. 많은 숙소와 식당들이 옹기종기 위치한 함피의 중심지는 많은 여행객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고 조용하다. 이런 곳은 역시 저마다의 낭만, '로맨스'를 찾기에 더없이 좋다.
우연과 찰나에 기댄 인연과 함께 사원의 돌바닥에 누워 쏟아지는 별을 보는 일, 혼자 있고 싶을 땐 사원이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일, 그러다 또 눈이 마주친 이에게 'Hi, how long have you been hampi?(함피에 얼마나 있었나요?)'라는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일, 하루의 인연과 연락처 대신 포옹으로 이별하는 일. 함피에서 보낸 모든 시간이 내겐 로맨스였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로맨스가 있을 테고, 낭만을 위한 장소로 함피는 썩 훌륭하다. 고요한 폐허만큼이나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좋은 곳이 또 어디 있을는지.
함피를 떠나는 길, 나는 그곳에서 만난 우연과 인연, 나의 로맨스를 함피의 수많은 돌 중 하나에 묻어두었다. 그렇게 수많은 돌기둥에 수많은 이들의 사연이 남겨졌을 것이다.
폐허 속에 남겨진 각자의 기억들은 돌을 깎아내는 바람보다 더 은밀하고 조용하게 함피에 무게를 남겼을 것이다. 함피의 공기가 육중함보다 아름다움으로 더 와닿았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다시 없을 돌의 미학과 낭만이 있는 곳, 인도의 함피로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