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부터 세곡 집산지였던 군산. 일제강점기 역시 군산은 '쌀의 도시'였다. 곡식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것. 일제는 밤에도 내항 곳곳에 전등을 대낮처럼 밝히고 전라·충청 일대에서 생산된 쌀을 주야로 실어 날랐다. 빈 선박(오사카-군산) 화물 운임이 30% 내외여서 군산항은 일본 상품을 반입하는 주요 항구로 자리매김 되었다.
군산선 개통(1912) 이후 철도가 내항까지 연장되고, 부두에 쌀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하면서 '미항(米港)'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개항하던 해(1899)부터 일본식 요정과 양식집이 영업을 개시하고,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곽 단지와 카페 골목이 조성되는 등 색줏집이 유달리 많아 색항(色巷) 혹은 화항(花港)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권번(券番)도 다른 도시보다 많았다. 군산에는 3개(군산권번·보성권번·소화권번)의 권번과 2개(한호예기·군창예기) 기생조합이 있었다. 그중 한호예기조합은 군산에 온 광복회 회원들이 그곳에 근거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으며, 소화권번(주) 박재효 사장은 자신이 죽으면 소유하고 있는 주식의 1/3을 야학에 기증하겠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기생들의 사회 활동
군산 소화권번(4년제)은 건물 내에 기생양성소를 차려놓고 동기(童妓)들에게 예의범절(걸음걸이, 말하는 법, 옷 입는 법, 앉음새 등)과 전통 가·무·악을 가르쳤다. 졸업 후에는 기생들의 스케줄(요정 놀음, 극장공연, 놀음차 계산 등)을 관리하였다. 일종의 예기 매니지먼트 회사로 요즘의 연예기획사 역할을 했던 것.
1931년 11월 15일 치 <매일신보>에 따르면 군산 기생들은 재만(在滿) 피란 동포 위로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소화권번 기생 김산호주가 내놓은 고무신 100켤레를 비롯해 수백 원에 달하는 성금을 모아 전달했다.
군산 기생들은 국내외 동포 의연금 모금 연주회, 영화상영 우정 출연, 가무 공연, 동정음악회(불우이웃돕기 음악회) 등을 개최하여 가난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돕거나 학교 설립기금으로 기탁하였다. 우리 물산장려 거리 행진과 성금 모금에도 앞장섰으며 조선인 야학 기성회, 체육회, 청년회 등 지역의 다양한 단체들과 교류하면서 지원도 하였다.
기생들의 사회 활동은 각종 음악회와 연주회, 가극대회, 적성야학교 돕기 행사, 신파극 공연, 영화 상영 후원금과 동경지진재해 의연금, 국내외 수재민 구호 성금, 사회 저명인사 부의금 등이 주를 이룬다. 일제 당국의 검열로 우리글로 발행되는 신문이 정간 당하자 위험을 감수하고 '독자 위안 연주회'를 개최했다.
전통 가무(歌舞) 계승, 보존에 큰 공 세워
중요한 대목은 전통 가무가 사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 명맥을 유지 보존하는 데 기생들이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극장공연을 비롯해 경성방송국과 지역 방송국에 출연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주요 도시에서 팔도명창대회(전조선명창대회·조선팔도명창대회·조선각도명창대회)가 해마다 열린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1930년 12월 3일 군산유아원이 주최하는 군산명창대회가 군산극장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대회에는 조선음률협회 김창환을 비롯해 다수의 인기가수 초청공연이 있었으며 군산 지역에서 명창으로 손꼽히는 소화권번 기생 김유앵, 김채옥 등이 무대에 올랐다.
그중 김유앵은 1932년 4월 21일(목요일)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단가>를 비롯해 <심청가>, <춘향전> 등을 열창하였다. 그 후에도 해마다(1933~1939)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였다.
한겨레 음악대사전에 따르면 김유앵은 1932년 4월 전조선명창대회, 1934년 9월 삼남수해구제연주회, 1938년 3월 여류명창대회 등에 출연하였다. 그는 남도민요 <육자배기> <흥타령> <성주풀이> <농부가> <자진농부가> <새타령> <진도아리랑> <개구리타령> 등을 취입하였으며 <남도잡가> <단가> <초한가> 등 여러 대목이 태평음반에 전한다.
소화권번 기생 이란향과 장향옥도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였다.(1933~1940) 이란향은 정석연, 지용구 등과 함께 <개고리 타령> 등 전통 민요를 방송했다. 장향옥은 오비취, 한성준, 허난수 등과 함께 가야금병창을 비롯해 <개고리타령> <공도난리> <남도가요> <남도민요> <남선가요> <농부가> 등 우리 민요 20여 곡을 불렀다.
기록에 따르면 군산 기생들은 1931년 9월 21일∼23일 서울 조선극장에서 열린 팔도명창대회를 비롯해 1935년 2월(음력 1월 1일~2일) 충북 청주앵좌에서 열린 조선명창대회, 1936년 10월 목포 가설극장에서 5일 동안 진행된 전 조선남녀명창대회, 1938년 3월 12일~13일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여류명창대회 등에 출연하여 전통음악 중심으로 공연을 펼쳤다.
광복 후 1960년대 초까지 창극단 활동
혼란했던 해방정국에도 군산 기생들은 창극단을 조직, <심청전> <흥보전> <춘향전> 등을 공연하였다. 그중 군산권번 창극부(출연진: 강산홍, 박농월, 서산홍, 홍갑수 등 남녀 14명)는 1948년 8월 군산 공회당에서 발표회(10일~14일)를 가졌다. 입장료를 받았음에도 성황을 이뤘으며 다음 달(9월) 앙코르 공연을 나흘간(17일~20일) 진행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소화권번 기생 김농주는 1948년 9월 국악여성동호회 출범 때 간부로 참여하였다. 회장 박녹주, 부회장 김연수·임유앵, 총무 조유색, 그리고 '감찰부'를 그가 맡은 것. 김농주는 그해 10월 시공관에서 일주일(24~31일) 동안 열린 창립기념공연(<옥중화·獄中花>)에 출연하였다. 여류 명창들로 구성된 국악여성동호회는 1949년 2월과 5월에도 김아부 작(作) <햇님과 달님>을 무대에 올렸으며 한국전쟁 중 피난처에서도 인기리에 공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1월 작고한 장금도 명인에 따르면 권번이 해체된 후에도 기생들 공연은 196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이때는 소화권번 기생들도 홍갑수가 이끄는 창극단에 들어가 군산권번 기생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장금도 명인도 <안중근 열사가> <이준 열사가> 등을 그때 배웠고 무대에도 몇 차례 올랐으나 아들의 심한 반대로 중도에 그만뒀다고 한다.
군산 기생들은 식민치하라는 모순된 구조 속에서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줬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동 돕기와 재외교포 의연금 모금, 광복 후 연극단 활동 등은 이들이 동시대인으로서 동포애와 민족의식이 뚜렷하고 전통 예술을 사랑하는 시민계층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군산 해어화 100년>(2018), 김민수 창원대학교 교수 논문
<1930년대 민속악의 공연양상>, 군산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옛날신문(1920~194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