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은 '세계 산재 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혹자는 '이미 세상에 없는 이들을 추모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할 수 있다. 떠나간 이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겪은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4월 28일에 죽은 이들을 기억하려고 하는가?
[연속기고①]
우리는 왜 서울아산병원의 사과를 요구하나
침묵 속에 잊히는 간호사의 죽음
지난해 2월 서울아산병원에서 한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과도한 업무량, 긴 노동시간, 부족한 노동 인력, 실수에 의한 사고 책임 부담, 조직문화의 문제 등이 죽음의 이유였다. 3개월에 불과한 신규 간호사가 교육 후 바로 중환자를 담당하게 한 부담도 고인이 죽음을 선택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누군가는 간호사의 죽음은 개인의 안타까운 비극일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간호사가 죽은 것은 우연한 일이며, 그런 일은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이 현상은 정말 개인의 비극,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지난해 1월 사람들의 시선을 끈 글이 미국 의학한림원 정기 간행물에 실린다. '간호사 자살, 침묵을 깨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저자는 미국에 보고된 간호사들의 자살 발생률을 살펴봤다. 그런데 이들은 본래 글의 목적에 부응하는 성과를 얻어내지 못한다. 의사, 교사, 경찰, 소방관 등 다양한 직종의 자살률에 대한 자료는 기존 문헌에서 찾을 수 있었던 반면, 간호사의 자살률을 전국 단위로 다룬 자료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질병관리본부는 자살 및 살인에 의한 사망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국가 폭력 사망 보고 시스템(NVDRS)을 구축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많은 양의 자료를 가진 국가 폭력 사망 보고시스템조차 간호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사망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또한 저자들이 문헌 자료를 검토한 결과, 2018년까지 미국에서 발생한 간호사 자살을 기술적으로 측정하고 서술한 논문은 다섯 개에 불과했다. 이 중 두 논문은 과거 자료를 재검토하는 논문이었고, 간호사의 자살 발생률을 다룬 논문의 흐름은 2002년에서 끊겼다.
미국 의학한림원은 별다른 결과물을 내지 못한 이 글을 간행물에 왜 실었을까? 이들은 "간호사들의 죽음을 다룬 이야기가 개별적인 일화로 흩어져 하나의 목소리로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고 말했다. 이는 사람들이 간호사들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현상을 수치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수치화되지 않은 죽음들이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며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문화적, 구조적 현실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간호사들의 죽음을 둘러싼 침묵을 깨지 않는 이상 예방할 수 있는 죽음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자들의 예상은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우리 사회에서 죽은 자의 목소리는 침묵 속에서 서서히 잊히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을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무뎌지고 있다.
실증적인 차원에서 간호사들의 죽음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이는 살아남은 우리가 해야 한다.
간호사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병원의 의지
의학을 공부하다 보면 질병을 해결하는 인류의 능력과 도전에 감탄하는 경우가 있다. 서울아산병원은 지금까지 분자생물학적 수준에서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질병의 영역에 도전하는 병원이었다.
그런데 서울아산병원은 왜 인간의 영역에 속한 병원 내 제도적·구조적 수준의 문제는 다루려 하지 않을까. 서울아산병원이 고 박선욱 간호사의 죽음을 다뤄온 방식을 돌이켜봤을 때, 이는 단순히 능력이 아닌 의지의 문제에 가까워 보였다.
사건 발생 후 서울아산병원은 신입 간호사 채용 지원자들에게 "우리 병원 신입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냐"라며 "본인은 어떤 방법으로 버틸 거냐"는 질문했다.
'유리 멘탈 탈출하기'라는 이름의 교육을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낙인찍었다. 이러한 대처 방식들은 서울아산병원이 고인의 죽음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병원의 문제는 침묵 속에 묻어두고, 사람들의 시선을 간호사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은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이 주관하는 평가 조사에 따라 13년 연속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병원'으로 선정되었다. 간호사의 죽음을 외면하는 곳이 어떻게 존경받을 자격이 있을까.
올해 3월, 근로복지공단은 박선욱 간호사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지난해 서울아산병원도 자체적으로 박선욱 간호사의 죽음을 진단했다. 당시 병원은 내부 감사팀 보고서에 "부족한 교육과 과도한 업무로 고인에게 스트레스를 줬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서울아산병원이 근로복지공단의 산업재해 판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그에 합당한 반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산업재해를 인정한다면 서울아산병원은 유족과 간호사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신규 간호사 교육 개선, 과도한 업무량 조절, 시간 외 근무 감소 등 제대로 된 재발 방지책도 마련해야 한다.
서울아산병원이 마련하는 재발방지책이 100% 완벽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서울아산병원이 고 박선욱 간호사의 죽음을 침묵 속에서 잊어버리려고 한다면, 우리가 그 기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수밖에 없다.
침묵 속 죽음을 기억하는 당신
'4월 28일이 누구를 위한 추모냐'고 묻는다면 "죽은 자를 기억하고 산 자를 위해 추모한다"고 답할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해 산 자를 위한 투쟁을 하고, 산 자를 위한 투쟁을 하기 위해 죽은 자를 기억한다.
기억하고 투쟁하는 것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고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현실 속에 익숙해진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행동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당신의 생각이 달라질지 모른다.
"변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개입하고, 참여하고, 다 같이 모여 그것을 요구할 때에만 일어난다 (Change only happens when ordinary people get involved, and they get engaged, and they come together to demand it)." –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더는 고 박선욱 간호사를 떠돌아다니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우리는 고 박선욱 간호사가 유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이 요구를 변화로 이어지게 만들 수 있는 주체는 정치인도, 전문가도 아닌 바로 당신이다. 바로 당신이 이 침묵을 깨야만 변화가 일어난다.
'서울아산병원의 사과와 간호사 근무환경 개선대책 마련 촉구 서명' ☞
http://bit.ly/서울아산병원사과하라
덧붙이는 글 | 유경 기자는 보건의료학생모임 '매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