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일왕이 4월 30일 퇴위한다. 1989년 1월 7일 56세 나이로 등극했던 그가 30년 만에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아키히토는 외교 분야에서 열성을 보여왔다. 1945년 패망 이후, 부왕인 히로히토의 해외 방문은 1971년 유럽 순방과 1975년 미국 방문뿐이었다. 아키히토의 외교 활동은 그런 아버지와 비교될 정도로 활발했다.
아키히토 일왕의 외국 방문에 관해 박순애 호남대 교수의 논문 '국제화 시대의 황실외교'는 2012년까지의 통계를 근거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아래 인용문 속의 '헤이세이 천황'은 아키히토다. 아키히토 즉위 이후의 연호를 헤이세이(平成)로 썼기 때문이다.
"헤이세이 천황은 (중략) 1989년 천황 즉위 직전까지 22회 37개국을 방문했으며, 천황 자격으로는 2012년까지 15회 32개국을 순방했다." - 서울대 일본연구소가 2013년 발행한 <일본 비평> 제9호.
일본 내각의 필요에 의해 움직였던 일왕
일왕의 행위에는 국사(國事) 행위와 공적 행위가 있다. 국사 행위는 헌법 제7조에 의해 인정된 것이고, 공적 행위는 내각의 책임 아래 수행하는 것이다. 헌법 제7조에 열거된 국사 행위 중에서 외교에 관한 것은 제9호의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한다"는 규정뿐이다. 새로 부임하는 외국 사절이 갖고 오는 신임장을 수리하는 권한만이 외교에 관한 일왕의 국사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그 외의 행위, 이를테면 외국 원수를 궁에 초대하는 일이나 외국을 직접 방문하는 일 등은 내각의 책임 하에 수행하는 공적 행위에 속한다. 이는 정상회담이나 해외 방문 같은 아키히토의 외교 활동이 그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역대 일본 내각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정부가 추진한 황실외교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면, 황실외교는 1960년대에는 일본의 대미 안보외교를 대신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에는 제3세계와 자원외교의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고, 1990년대에는 대중(국) 경제외교를 담당했다. 황실외교는 일본 정권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이용되어 왔다."
이렇게 내각의 책임 아래 진행된 정상회담이나 해외 방문을 통해 아키히토는 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총리나 외무대신이 하기 힘든 일들을 해냈다. 그런 중에 대단한 성과도 있었다. 2009년 11월 14일 궁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90도 인사를 받은 일이 그중 하나다.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27일 아버지 히로히토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집무실을 방문해 굴욕적인 기념사진을 찍었다. 맥아더의 큰 키와 히로히토의 작은 키, 맥아더의 편한 군복 차림과 히로히토의 엄숙한 예복 차림이 대조를 이루는 그 사진은 두 나라의 수직관계를 상징하는 증거로 활용됐다.
그런데 아키히토는 미국 대통령한테 90도 인사를 받았다. 일본의 변화된 위상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일본 총리 같으면 받을 수 없었을 90도 인사를 받았으니, 아키히토 외교의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반일감정 강한 중국에도 갔지만, 한국은 아직
아키히토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수확을 거뒀다. 일본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중국을 1992년 10월 23일 방문한 것. 한국과 더불어 일본을 가장 미워하는 중국에 발을 들여놓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당시 아키히토는 중국 국민들에게 "다대한 고난을 준 것을 깊은 슬픔"으로 인식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년 전 노태우 대통령한테 했던 '통석의 염' 같은 애매한 신조어를 쓰지 않고 비교적 명확한 표현을 썼던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아키히토는 보다 높은 수준의 사과를 하지 않고는 중국을 방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중국은 1989년 천안문 사태(민주화운동 진압)로 인해 서방세계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런 압박을 탈피할 목적으로 그 정도 선에서 사과를 받고 일왕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던 것이다. 당시 일왕의 사과 역시 최선의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에 대한 사과보다는 비교적 구체적이었다는 점이다.
아키히토는 미국·중국과의 외교에서는 성과를 거뒀지만,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여태껏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상왕이 된 뒤에도 기회가 있을 수 있지만, 4월 30일 퇴임 뒤에는 성과를 낼 기회가 더욱 더 없게 된다. 그의 기억 속에서 한국은 쉽게 풀리지 않는 난제로 기억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밉든 곱든 함께 갈 수밖에 없는 나라다. 일본에 대한 부정적 세계 여론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주체는 중국과 더불어 한국 국민들이다. 위안부 피해자·강제징용·역사 교과서 등을 소재로 일본의 도덕성을 떨어트리는 여론이 한국 국민들에 의해 조성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일본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한국 국민들의 마음을 돌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내 보수세력은 강제징용 판결이나 한일 레이더 갈등 등의 사건 때문에 한일관계가 파탄나지 않을까 염려하지만, 한일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면 한국보다는 일본이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한일 관계 악화로 일본의 전쟁범죄가 자꾸 부각되면 일본 기업들의 해외 활동에도 지장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일본은 도덕적 위상을 회복할 목적에서라도 한일관계를 신속히 정상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필요성에서 이제까지 꾸준히 추진된 게 바로 아키히토 일왕의 한국 방문이다. 일왕의 방한이 일본에 선사하는 긍정적 의미에 관해 국제지역학 학자인 전규환의 논문 '일본의 황실외교와 한일관계 - 헤이세이 천황을 중심으로'는 이렇게 정리한다.
"만일 천황의 한국 방문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양국의 과거사를 털어버리는 매듭점이 되는 동시에 새로운 한일관계 개막의 시작을 의미하는 사건이 될 것이고, 국제친선의 도모와 위령을 표방하고 있는 황실외교는 이로써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 현대일본학회가 2017년 발행한 <일본연구 논총> 제45호.
일왕의 방한이 성사되면 한일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할 뿐 아니라 일본 왕실의 존재의의도 한층 높아질 거라는 이야기다. 실질적 권력도 없이 최고 자리에 군림하는 왕실 입장에서는, 내각과 여당이 못해낸 한일 화해를 성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존립 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키히토의 방한은 매번 무산됐다. 일본 정부는 아키히토가 왕세자일 때부터 그의 방한을 추진했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고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였던 1986년에도 그의 방한이 추진됐다.
즉위한 뒤로도 한국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추진됐지만 매번 무산됐다. 그가 한국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일본 왕실은 백제의 후손'이라는 발언도 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일본은 한일관계가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일왕이 한국을 방문할 수 없는 이유를 한국 탓으로만 돌려왔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국민들의 탓으로 돌려왔다.
일왕의 한국 방문, 선결조건은...
한일 양국 정부는 한미일 삼각동맹의 완성을 목표로 한일 화해를 희망하는 미국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일 양국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을 적극 추구하고 일왕의 방한을 추진했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혀 매번 실패했다. 일본 정부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한국 탓을 할 때, 그 '한국'은 한국 정부가 아니라 한국 국민들이다.
한국 국민들이 한일관계를 견제하고 아키히토의 방문을 반대한 것은, 미국의 중재 하에 이뤄지는 한일 두 정부의 화해 움직임이 한국 국민들의 입장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미 양국 정부와의 암묵적 합의 하에 형식적 사과를 되풀이할 뿐 아니라 결정적 순간마다 망언을 내뱉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일본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래서 아키히토의 방한이 매번 무산된 것이다.
따라서 아키히토의 방한이 무산된 책임은 자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한일 화해를 주먹구구식으로 밀어붙이는 미국, '통석의 염' 같은 조어로 모호한 자세를 취해온 일본, 자국 국민보다 미국의 눈치를 살피며 어설픈 한일 화해에 동의한 한국 정부에서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키히토가 상왕이 된 뒤 한국 방문을 재추진하든 새로운 일왕이 한국 방문을 추진하든 간에, 일왕의 한국 방문을 가능케 하는 선결 조건은 일본이 과거 범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세계를 감동시킬 정도의 사과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루히토 일왕 시대에 일본 왕실과 정부가 지향해야 할 한일관계의 대전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