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대학로 거리에서 시작된 퀴어문화축제가 어느새 스무번째를 맞습니다. 성소수자라는 주제로 세대 간 대화를 시도하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편집자말] |
"내 아들이 게이래요. 어떡하죠?"
어쩔 줄 몰라 하며 질문을 쏟아내는 부모들 앞에서 그는 태연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마이크를 잡았다.
"저도 아버님이 계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도 똑같았습니다. 지금 그 정도면 굉장히 잘 하고 계신 겁니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분하게 위로의 말을 이어갔다.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정기모임이 열렸던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성소수자 부모모임 사무실을 찾았다. 4층의 작은 사무실은 성소수자들과 그들의 부모로 가득 차 곧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만석'인 가운데서도 처음 온 부모들은 대번 표가 났다. 얼굴에 초조함이 서려있거나 화가 난 것 같았고 때로는 체념한 듯 보였다.
위로의 말을 건넨 그는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운영위원 지미(활동명)였다. 그 또한 3년 전 아들의 커밍아웃을 접하고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은 마이크를 잡고 여유 있게 말을 하지만 그도 처음 왔을 땐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충격 탓에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을 하면 눈물이 흐를까봐 자기소개만 겨우겨우 했단다. 그랬던 그가 3년 뒤인 오늘, 부인과 함께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활동가가 됐다. 그는 주로 처음 성소수자 부모모임을 찾는 '아버지들'을 '담당'한다.
3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지난 26일 그가 사는 경기도 일산의 자택을 찾았다. 지미는 아들 빗방울(활동명)과 함께 우리를 맞았다.
기사에 들어갈 사진을 찍으면서 서로 마주보거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등 다정한 포즈를 취하던 빗방울은 아빠를 향해 쑥스러운 듯 말을 걸었다. "이거 커밍아웃했을 때보다 더 어색해!" 커밍아웃이란 말은 어느새 이들의 일상적인 농담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저 동성애자예요"
"저는 동성애자예요. 부모님이 얼마나 충격이 크실지 알아요. (중략)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했을 때 폭언을 듣거나 심하게는 집에서 내쫓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해요. 이 편지를 읽는 지금은 저를 '부정'하는 단계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엔 부모님이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실 거라 확신해요. 저는 부모님이 제가 어떤 사람이든지 제 행복을 지지해줄 분들이란 걸 알거든요.
(중략) 한편으로는 기쁘게 생각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저는 부모님과 더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싶어서 이런 말씀도 드리는 거니까요." (3년 전 빗방울이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 중 발췌)
2016년, 빗방울은 편지만 남겨두고 집을 나갔다. 빗방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폭탄을 던지듯" 편지를 투하했다. 아빠와 엄마는 충격을 받았다. 아빠는 멍하니 시간을 보냈고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빗방울은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기 위해 한 달을 준비했다. 만에 하나 연이 끊기는 곤란한 상황에 놓일까봐 미리 500만 원을 모아두고 입대 신청도 해둔 상태였다. 그만큼 두려웠다.
정체성을 알고 난 이후에는 조심스럽게 아빠에게 성소수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들을 존중하지만 아빠 옆에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아빠인 지미는 그 당시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 그렇게 말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지미 "부모들은 절대 모릅니다. 자녀들이 주는 시그널을 부모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웃음)"
커밍아웃이라는 '사건'이 이들 가족을 잠시 흔들었다. 하지만 아들 빗방울의 말처럼 부자 관계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아빠와 아들은 여전히 사회 문제에 대해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이야기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려 노력한다. 다만 성소수자라는 주제가 이들 사이에 좀 더 빈번하게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 더 많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미)
성소수자 부모모임, 첫 모임
그로부터 사흘 뒤, 지미는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문을 두드린다. "아들이 원해서 억지로 갔다"던 그였다. 그럼에도 아들의 밝은 얼굴을 봐서 좋았단다.
- 사흘 만에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찾아가셨어요. '내 아들은 게이가 아닐 거야'라는 '현실 부정'의 과정을 오래 겪지 않으셨네요?
지미 "제가 비교적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어요. 뜬금없이 제가 뒤늦은 향학열이 생겨서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녔습니다. 아들이 제게 커밍아웃을 하던 즈음이었어요. 문화교양학과의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중간고사를 볼 때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보게 됐어요. 그 전에 아는 지인 분이 제게 커밍아웃을 하셨는데 제가 그때 '걱정마세요. (동성애는) 다 치료가 되는 거예요'라고 했어요.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그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구나' 싶어서 '동성애자'를 주제로 택해서 시험을 봤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드라마틱해요. 비교적 정확한 정보가 있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요."
- 교육의 중요성이 이렇게 증명되는 건가요? (웃음)
지미 "교육으로 바뀔 수 없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럼에도 성소수자가 뭔지 몰라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빗방울은 그날 그 자리에 부모님과 함께 간 걸 지금도 잘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저는 준비된 방법으로 커밍아웃을 잘했다고 생각해요. 동성애자 당사자들도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오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저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커밍아웃 후 반응에 대해 아무 것도 상상할 수가 없었어요. 주변에 커밍아웃을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부모들도 성소수자들만큼 자신의 소수자성에 대해서 힘들어 해요. 자식이 성소수자일 때 부모 역시 소수자가 돼버리거든요.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오는 부모들 대부분이 '나는 전 세계에서 나 혼자 성소수자 부모인 줄 알았다'고 말해요. 부모모임에 와서 성소수자들과 그 부모들이 여기 많이 있다고 위로해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 자식의 커밍아웃에 대해 부모님이 어떤 반응을 보여주길 원하나요?
빗방울 "다른 걸 다 떠나서 부정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처음에 부모님이 부모모임에 나와서 '내 아들이 게이라서 힘들다'고 하면서 우셨을 때 전 기뻤어요. 최소한 '내 아들은 게이가 아닐 거야'라고 부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슬픔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슬픔이 덜해지고 넘길 준비가 돼있다고 생각해요. 친구들이 너희 부모님 우시는데 넌 왜 싱글벙글 하냐고 하기도 했어요. (일동 웃음)"
- 그렇다면 좋은 커밍아웃은 어떤 걸까요?
빗방울 "'아빠, 내가 게이니까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오세요' 이렇게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태도로 나가는 게 좋아요. '아빠, 내가 게이라는데 어떡하죠?'라는 태도라면 아빠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예요. 이게 '그러면 게이가 아니도록 해보자'고 합의안을 도출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요. '게이라는 사실은 바뀔 수 없다'는 방식이 훗날 부모 입장에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까요?"
여기에 아빠인 지미도 첨언했다.
"오래 생각해온 질문인데요. 일단 커밍아웃은 꼭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제를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부모도 결국에는 남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인정받겠다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커밍아웃 역시 무거워지니까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하고 싶다면 일단 경제적 독립과 정서적인 독립이 내게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지원을 끊어도 문제가 없는지 그리고 안 보고 산다고 해도 내가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답변이 준비됐을 때 커밍아웃이 전달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부모의 도움이 절실하고 내가 삶을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경우에는 이런 전제조건은 다 필요 없습니다. 바로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독립을 한 뒤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부모의 '커밍아웃'
자녀의 커밍아웃 이후엔 부모도 커밍아웃을 하게 될 일이 생긴다. 필요할 경우 내 자식이 성소수자(게이)라는 걸 주변인들에게 말하는 일이다.
지미의 경우 '술김'에 '부모 커밍아웃'을 감행했다. 그는 다니던 등산모임이 성소수자 부모모임 날짜와 겹치게 되자 고백한 것.
"등산모임을 하는데 공교롭게 등산을 하는 날짜가 성소수자 부모모임을 하는 날짜였어요. 그래서 '내가 토요일마다 일이 있어. 인권 운동을 해야 돼. 내 아들이 동성애자라 내가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가야 돼'라고 말하자 갑자기 조용해졌어요. 그래도 작년 퀴어퍼레이드에 제 친구들이 많이 와줬어요. 상상도 못한 지지를 보내줬고 응원을 해줬어요."
- 자식이 성소수자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지미 "그 분들도 누군가의 자식이겠지요. 내가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부모님이 그걸 거절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세상에 부모이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들 누군가의 자식이기도 합니다. 내 자식을 대할 때 부모로서만 바라보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내가 그 나이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돌이켜보면 됩니다. 그러면 대부분 문제가 풀립니다. 내가 바랐던 걸 내 자녀도 나한테 바란다고 생각해주면 되지 않을까요?"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온 부모들은 결국 '성소수자 부모됨'보다 궁극적으로는 '좋은 부모됨'을 고민하면서 돌아간다. 지미에게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인지를 물었다.
"자기가 부모로서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아는 사람. 그 이야기를 자녀에게 하는 사람이요. 애들 앞에서 '가오' 잡거나 그러지 않고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놀랐으면 놀랐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내 유전자가 일부 흘러갔을 뿐 자녀는 나와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아요. 왜 우리는 직장 동료나 친구의 다름은 인정하면서 자식의 다름은 인정하지 않을까요?"
성소수자 부모모임은? |
성소수자 부모모임은 2013년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모임'이라는 네이버 카페를 개설하면서 시작됐다. 2015년부터는 꾸준히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고 있다. 오는 6월 1일 서울퀴어문화축제 당일 서울 시청에 오면 '프리허그'를 하는 성소수자의 부모들을 만날 수 있다.
정기 모임에 참여하려면 성소수자 부모모임 홈페이지(pflagkorea.org)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모임에 나가기 부담스럽다면 홈페이지에 있는 상담란을 통해 연락해도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