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은 혹독한 시련기를 겪는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듯이 직업적인 진보운동가에게 생업이 있을 리 없고, 그렇다고 이념을 먹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부인이 최소한의 생활비는 벌어오지만, 그 역시 '운동권의 선수급'이어서 직장을 갖는 일이 쉽지 않아서 고정된 수입원이 없었다.
길은 정해졌다.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진보정당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세 확장에 나섰다. 자금이 없어서 인간적인 신뢰와 진정어린 설득이 무기였다. 인민노련의 조직이 큰 기반이 되었다. 그때 만났던 동지들은 견디기 어려운 탄압을 받고도 신념과 의리를 지키며 뜻을 같이하였다. 그의 노동운동ㆍ정치활동의 뿌리는 인민노련에서 발원한다. 노회찬 개인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한국진보 정당의 뿌리라는 평가도 따른다.
인민노련의 '노선'은 이후 민중당, 진보정당 추진위원회(진정추), 진보정치연합,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정의당으로 이어졌다. 정의당의 기원을 찾다 보면 끄트머리에서 만나는 것이 바로 인민노련이고 거기에는 노회찬과 그의 동지들이 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될 때 장기표, 이우재, 김문수, 이재오가 간판이었지만 지구당 위원장의 80% 이상이 인민노련에서 나왔다는 사실만 봐도 인민노련이 어떤 조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주석 3)
한국 보수정당은 부패로 망하고 진보정당은 분열로 망한다는 세평이 있다.
1980년대 이후 정치적 완화 국면에서 몇차례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이 나오고 이합집산과 자체분열을 거듭하였다. 1989년 9월 전민련 2차 중앙위원회에서 새정당 창건을 결의하고 이후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당이 통합하며 진보정당건설을 위한 정치연합이 발족되었다.
여기서 '민중의 정당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의 결성을 제안, 진보정당 준비모임이 구성되고, 활동에 나섰으나 이재오ㆍ김문수ㆍ이우재 등 일부 명망가들이 이탈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노회찬의 증언.
민중당을 만들었던 두 그룹이 있다. 선배 명망가 그룹과 노동운동 그룹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같이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민중의 당도 있었고, 한겨레민주당도 있었다.
그러다 1990년 11월, 민중당을 건설하며 두 그룹이 합류한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의 갈등이 1992년 총선을 계기로 폭발했다. 그리고 선배 명망가 그룹은 결국 한나라당 쪽으로 많이 갔다. 한나라당으로 간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 등과 '나홀로' 길을 간 장기표 등이 있었다. (주석 4)
한국 보수세력은 뇌물ㆍ이권ㆍ비리 등 재물을 탐하다가 망하는데, 먹잇감도 없는 진보진영은 이념에 따라 분열했다. 그래서 보수는 90%가 다르고 10%만 같아도 함께 하는데, 진보는 99%가 같고 1%만 달라도 함께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왔다.
노회찬은 진보진영 명망가들의 변신과 이합집산을 지켜보면서 진보정치연합을 결성하는 등 묵묵히 한길을 걷는다.
저는 어쩌면 한 우물 파야 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 우물을 판 게 아니에요. 결과적으론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실은 체념도 거기에 끼어 있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결론에 도달한 거죠. 그러다 보니까 마지막에 저한테 남는 건 뭐였는가 하면 어떤 현실성과 합리성이었지요.
이 역시 하다가 안 되면 다른 일을 할까 라는 생각은 없어졌기 때문에 얻은 습성인지 몰라요. 이 일하는 것만 남아있으니까 이 일을 잘하려면 합리성과 현실성이 있어야겠다, 이런 거죠. 저는 책을 찾아 읽으면서 그런 능력을 길렀다기보다는 저의 판단을 항상 반추해서 검토했어요. 내 판단이 옳았을 수도 있고, 약간 잘못됐을 수도 있고, 또는 완전히 잘못됐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그때 내가 어떠어떠한 이유 때문에 그런 판단을 했는가. 그때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게 무엇이었느냐, 이걸 계속 반복했어요. (주석 5)
주석
3> 이광호, 「진보정당 운동과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24~25쪽, 후마니타스, 2019.
4>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98쪽.
5> 『진보의 재탄생』, 134~13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