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군함도’뿐만 아니라 일본 곳곳에 그 현장이 많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조세이 탄광, 부관연락 터와 똥굴마을, 타가와 석탄박물관과 휴가 묘지, 오다야마 묘지의 ‘조선인 조난자 위령비’를 4회에 걸쳐 소개합니다.[편집자말] |
조선인조난자위령비.
일본 기타큐슈시 오카마쓰의 오다야마 묘지 한 구석에 있다. 화장해 납골당을 모아 놓은 일본인의 공동묘지 한 귀퉁이 언덕에 한글과 일본어로 된 비석이 있다. 그나마 '위령비'라도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때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어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죽어간 조선인들이 많았다. 상당수는 어떻게 죽었고,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는데 이곳에는 그 원혼이라도 달래듯 비석이라도 세워 징표를 해놓았으니 말이다.
지난 5월 27일, '강제징용 유적지 답사'에 나선 '통일촌'‧'통일엔평화' 회원들은 위령비 앞에 묵념을 하고 국화를 놓았다. 그리고 무용가 김태린 진주민예총 회장은 원혼을 달래듯 '진혼무'를 추었다.
위령비 앞에 놓았던 국화가 시들어 버리는 게 안타까워, 회원들은 비석의 주인공들이 묻혀 있는 땅 위에 꽂았다. 메마른 땅이지만 그래도 몇 송이는 자라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1945년 9월 17일, 태풍에 80여명 탄 목선 조난
이곳에 위령비가 세워진 때는 1990년 12월이다. 재일교포들의 요구로 기타큐슈시청이 묘지 앞에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4년 뒤인 1994년 8월에는 한글과 일본어로 된 안내판이 세워졌다. 재일교포들은 해마다 9월 17일 이곳에서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이곳에 묻혀 있는 주인공은 80여명의 조선인. 그들은 1945년 9월 17일, 고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가 바다에서 조난을 당했다. 당시 일본에는 초특급 태풍(미쿠라자키)가 강타했다. '미쿠라자키'는 후쿠오카 기상대가 생긴 이래 최대의 태풍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탔던 배는 기껏해야 60톤 정도의 목선이었다. 엔진도 조악해 제대로 나아갈 수 없었고, 속력은 60노트 정도였다고 한다.
재일교포 김정배(78)씨는 "오직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출항을 강행했던 것이다"며 "당시 초특급 태풍으로 큰 선박도 항해를 중단할 정도였는데, 얼마나 고국으로 가고 싶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 싶다"고 했다.
조난당했던 사람들은 시체가 되어 해안가로 떠밀려 왔다. 그곳이 와카마쓰 해안가였다. 조선인 80여명은 그렇게 일본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대한해협을 넘지 못하고, 그것도 죽어서 다시 일본 땅으로 온 것이다.
해안가에 늘려 있던 사체를 주민들이 수습해 이곳에 묻었다. 80여명의 조선인 시신은 봉분도 없이 30여평의 땅에 한꺼번에 묻힌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태풍으로 60여척이 침몰했다고 하니 조선인 희생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조선인 조난자의 참상은 오랫동안 잊어져 있다가 재일교포들이 증언 등을 통해 찾아내 알려졌다.
기타큐슈시는 위령비를 세우면서 "강제연행 등으로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이 앞다투어 귀국하다 와까마쯔 바다에서 폭풍으로 조난 당했습니다. 그 시신이 여기에 잠자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뜻을 가득 감은 이 비를 건립합니다"라고 안내판에 해놓았다.
분명하게 '강제연행'이라고 해놓은 것이다.
위령비 옆에는 강영환 시인(부산)이 쓴 "그대 외롭지 않으리-오다야마 언덕에 솟대를 세우며"라는 시가 새겨진 목판이 세워져 있다. 이 시비는 2007년에 세웠다가 2018년 10월 다시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위령비 옆에는 '솟대'가 하늘을 향해 세워져 있다. '마을 수호신의 상징'인 솟대가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조선인들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김정배씨는 "우리는 해마다 9월 17일 이곳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이곳에 묻힌 영혼도, 지금 일본에 사는 교포들의 마음도 한결 같을 것이다. 지금 국제 사회가 복잡하지만, 남북 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한 시도 놓은 적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