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말하고 꿈꾸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시대, 우리에게는 더 많은 롤모델이 필요합니다. '야망 있는 여자들을 위한 비밀사교클럽'은 사회 곳곳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며 마음껏 야망을 품고 살아가는 30대 이상 여성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
[기사수정 : 18일 오후 7시 13분]
"More Dignity Less Bullshit(여성에게 더 많은 존엄을 - 기자 의역)"
서울 용산구 한남동 '울프소셜클럽'에 가면 이런 문구가 나를 반긴다. 주인의 재치 있는 한마디에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힙하다'는 동네 한남동, 나른한 햇살이 창을 지나 재즈음반이 즐비한 벽으로 쏟아지는 이 온화한 공간에 저런 문구라니. 늑대(wolf)의 으르렁거림이 느껴지는 말이다. 과연 김진아 대표다운 곳이로구나 싶었다.
울프소셜클럽은 김진아 대표가 비정기적인 소셜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카페 겸 바(Bar)다. 주로 페미니즘 관련 모임이 열린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대표는 공간 이름도 버지니아 울프의 'Woolf'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소설가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버지니아울프가 이야기한 '자기만의 방'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울프소셜클럽은 얼마 전 <뉴욕타임스>가 서울의 주목할 만한 페미니스트 공간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 공간을 운영하는 김진아 대표는 프리랜서 카피라이터이자 책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의 저자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에겐 연대가 필요하다며 야망과 정치를 부르짖는 그녀가 마음에 쏙 들었다.
"여성에게 정치야말로 선택이 아닌 필수."
"야망이 여자를 살린다."
"여성에게 더 많은 파이를."
여성들에게 연대와 정치는 왜 필요할까? 우리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김진아 대표를 울프소셜클럽에서 만나 그녀의 뜨거우면서도 냉철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꿈은 단절되지 않는다
- '울프소셜클럽'에 대해 소개해줄 수 있나. 최근에 <뉴욕타임스>에서 페미니즘 공간으로 소개하기도 했는데.
"평소에는 카페나 바처럼 운영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함께 이야기해볼 이슈가 있을 때, 서로의 이야기가 듣고 싶을 때, 비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여성 프리랜서 모임이 열리기도 한다. 2017년부터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았다."
김진아 대표는 박카스, 현대자동차, KT올레, 현대카드 등 다양한 브랜드의 TV CF를 진행했고 2016년 아이소이 '선영아 사랑해' 리부트 캠페인으로 한국에 펨버타이징(페미니즘+애드버타이징)의 문을 열었다.
- 울프소셜클럽 대표 외에도 다른 직업이 있는 것으로 안다.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다. 원래 광고대행사에서 일했다. 카피라이터일만 20년 가까이 한 셈이다. 나도 초롱씨(인터뷰어)처럼 여러가지 일을 한다. 울프소셜클럽이라는 공간도 운영하지만 원고 의뢰가 들어오면 글도 쓰고, 그걸 모아 책도 낸다. 울프소셜클럽이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게 한국의 자영업 현실이다."
- 울프소셜클럽이 안정적인 수입원이 된다면 카피라이터를 안 하겠다는 말인가? 정체성을 어디에 두고 있나.
"한 가지 일로는 안정적인 수익원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것도 있다.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일만으로도 수입이 충분했다면 애초에 울프소셜클럽을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본업은 카피라이터라고 생각한다. 직업으로서 싫어한 시간과 좋아한 시간이 이제서야 비슷해져간다."
- 왜 싫어했나?
"나는 세 살부터 스무살까지 그림을 그렸고 미대에 갔다. 자연스럽게 길러진 예술가 자아 때문에 회사에서 원하는 것을 맞춰주는 게 힘들었다. 카피라이팅 일은 상업적인 일이고 수시로 영혼을 팔아야 하는 일이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브랜드 철학이나 제품도 사랑하는 것처럼 포장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내적인 갈등이 심했다.
게다가 카피라이터 일이라는 게 거절당하고 수정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과정이다. 며칠, 몇 주 동안 갈아만든 아이디어가 클라이언트 한마디에 통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죽은 아이디어들의 무덤이 어마어마하다."
- 지금은 예술가 자아와 상업적인 이해가 화해를 한 셈인가?
"광고일 10년을 하고 나니 그제서야 감이 좀 왔다.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전반 10년을 버텼던 건 순전히 카드값 때문이었다(웃음). 이제는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캠페인 콘셉트를 일치시키는 데 집중한다.
최근 스텔라 맥주 캠페인에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 프리랜서'로 참여했는데, 클라이언트가 3040여성을 타깃으로 광고를 하고 싶어했다. 한국은 드라마는 물론이고 광고에서도 엄마, 아내, 며느리, 아줌마 같은 전형적인 역할 이외의 40대 여성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 틀을 깨고 싶었다. 멋있게 나이 든 프로페셔널을 보여주자!
광고주 역시 40대 일하는 여성을 보여 주자는 데 공감했다. '꿈은 단절되지 않는다'가 키 카피(Key copy)다. 각자의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고 진도를 나가는 한국 여성에게 보내는 찬사이자 나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실패하는 경험을 많이 가지는 것
- 광고대행사도 오래 다녔지만, 회사를 나와서도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다. 어느 쪽이 더 만족스러웠나? 프리랜서를 추천하는가?
"추천하지 않는다(웃음). 기업 안에서 10년, 밖에서 10년을 보낸 셈인데, 확실히 조직에 남아있는 게 자산 증식 차원에서 낫다. 웬만하면 성 안에서 버티길 권한다. 도저히 못 견디고 프리랜서 해야겠다 싶으면 조직에서 생활하는 동안 충분히 자기 먹거리를 챙겨 나오라고 말하고 싶다. 프리랜서도 준비가 필요하다. 자신을 보호하는 법도 모르고 클라이언트 상대하는 스킬도 없으면 곤란하다. 업계 파악하고 인맥 쌓으려면 최소 5년은 인고의 준비가 필요하다.
- 회사 안에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좋은가?
"실패하는 경험을 많이 가질 수 있어서 좋다. 처음부터 나 혼자서 내 돈을 들여서 무언가를 하면 실패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투자도 내가 해야 하고, 실패해도 내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에 있으면 프로젝트를 어깨너머로 구경할 수도 있지만, 내가 맡아서 실패해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당장 쫓겨나지 않는다. 실패하면 실력이 는다. 이쪽 분야의 경우엔 광고를 말아먹으면서 길러지는 감이나 직관 같은 것이 있다. 만약 그런 실패의 기회없이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된다면 그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나."
회사 안에서는 실패할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는 게 이점이라는 말에 공감했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딛어도 안전망 없이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실패할 수 있는 기회는 소중하다. 실패할 수 있는 것이, 곧 권력이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나이가 먹으면 조직에서 더 쉽게 떨어져 나간다. 유리천장은 여전히 공고하다. 실패할 기회를 예찬하며 마냥 회사에만 있기도 어렵다. 언젠가 회사를 나와야 한다면, 그 안에서 경쟁력을 길러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