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하는 일은 마을 어르신들의 구술을 듣고, 그분들이 살아내신 예전의 기억들이 담긴 사진, 기록물로 포토텔링(photo telling)이라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미지거나 때론 예전 모습을 찾을 길 없는 모습으로 변한 골목길이나 개발이 되고 있는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어르신들에게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해설사분과 동행하여 지난 과거 기록을 찾아 그 지역을 찾는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며칠 전엔 서구 송도 지역을 투어하는 일정이었다. 송도 해수욕장 근처인 암남동엔 유독 명사들의 사택이나 별장이 많아서 그날의 투어는 마치 보물지도를 가지고 찾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묘한 설렘과 기대로 찾아가 보았는데 막상 다다른 곳의 모습은 옛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예전 그대로의 보존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안내판조차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송도 해수욕장이 이제 100년 역사를 훌쩍 넘기고, 해상케이블카와 구름 산책로로 관광객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또한 인근 천마산 공원을 오르다보면 그 시대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진과 설명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 찾아오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해준다.

그렇기에 송도 해수욕장과 암남동 인근에 피란과 임시수도 시절 명사들의 사택이나 별장 등이 있었던 기록에 대한 설명이나 안내판이 없는 것이 나로서는 너무 안타까웠다.

또한 부산 출신 한국의 대표 여성 정치인인 박순천 여사 역시 임시수도 시절 송도에 사셨다는 사택이 있는데, 여기 또한 지금은 그저 숙박 시절만 있을 뿐이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반나절을 보내며 투어를 이어가던 중 해설사님의 발걸음이 바빠지셨다. 뒤따르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곡각지 형태의 골목이었다. 그곳엔 누군가의 손길로 만들어진 화단과 '꽃샘터'라는 이름의 담장이 꾸며져 있었다.
 
피란 시절 암남동 공동 우물터  서구 송도 암남동에 위치한 공동 우물터로 쓰레기로 가득 메워졌던 곳이 인근 할머니의 수고로움으로 화단이 된 모습입니다.
피란 시절 암남동 공동 우물터 서구 송도 암남동에 위치한 공동 우물터로 쓰레기로 가득 메워졌던 곳이 인근 할머니의 수고로움으로 화단이 된 모습입니다. ⓒ 박미혜
 
해설사님께서 이곳이 피란 시절 공동우물터라고 말씀해주셨다. 화분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는데, 아직도 수도관으로 물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단 인근 집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시더니 본인이 화단을 이렇게 꾸며 놓으셨다고 하는 게 아닌가.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사람들이 쓰레기를 산처럼 쌓아놔서 아이쿠! 이사를 잘못 왔구나" 했다며 옛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다시 이사할 곳을 찾기보다 이곳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 끝에 인근 주택 공사하면서 남은 페인트를 얻어서 꾸미기 시작하셨다고.
 
고 앙드레김 선생의 사택지 고 앙드레김 선생님과 어머니가 피란시절 부산으로 내려와 지냈던 암남동 사택지의 현모습이다.지금은 유치원에서 노인재가시설로 리모텔링 공사중
고 앙드레김 선생의 사택지고 앙드레김 선생님과 어머니가 피란시절 부산으로 내려와 지냈던 암남동 사택지의 현모습이다.지금은 유치원에서 노인재가시설로 리모텔링 공사중 ⓒ 박미혜

할머니의 예쁜 마음과 수고로움으로 이웃들도, 관광객들도 피해다니던 곳이 지금의 예쁜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앙증맞게 주소도 적어 두셨다. 이곳이 지난 시절 우물터였다는것을 오는 이에게 알려 주시려는 할머니의 귀한 마음씨였다.

가슴이 벅차오르게 행복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렇듯 도시의 지난 흔적을 찾는 일에서 오늘처럼 보람된 적이 많치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번의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을 맞이했다. 공동우물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고 앙드레김 선생의 사택이 있었던 곳을 찾아갔다.

그곳엔 파랑새 유치원이라는 시설이 있었고, 현재는 아이들의 감소하여 문을 닫고 다시 어르신들을 위한 시설로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공사 현장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인지, 공사 현장 소장님이 안전을 위한 당부를 하러 다가오셨다가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는 조심스레 부탁을 하셨다.

"인근에 사시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곳이 앙드레김 선생이 살아생전 어머님과 사시던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분을 기리기도 하고, 이렇게 찾아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안내판을 만들고 싶은데 방법을 알려주세요."

아! 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덥석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내가 곳곳의 마을 골목을 다니며 역사의 흔적을 찾고, 어르신들의 구술을 듣고 기록하는 것이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을 위함이 아닌가 하는 맘에서 말이다.

현장 소장님께 관계자와 구청에 알아봐 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인사를 드리고 그 날의 일정을 모두 마쳤다. 지금 부산도 곳곳의 마을에서 도시 재생을 위한 주민들의 모임과 또한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함께 하는 사업들이 많아지고 있다.

도시가 행복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에 오늘 만난 이들의 손길처럼 배려와 마음씀을 잘 듣고 받아들여서 정책에 입혀지고,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역시도 그 일을 계속 하겠지만, 혼자의 열 걸음 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낫지 않겠냐는 말처럼 말이다.

##송도 암남동##피란 시절 ##임시 수도 ##공동 우물터 ##앙드레 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삶의 기억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과 그 기록들을 잘 담고 후세에 알려줄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