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개봉한 조던 필의 감독 데뷔작 <겟 아웃>은 미국 내에 아직까지 존재하는 인종차별을 스릴 있게 풀어낸 작품이다. <겟 아웃>의 특별한 점이라면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차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흑인 크리스(다니엘 칼루야 분)와 백인 로즈(앨리슨 윌리엄스 분)는 교제 중이다. 로즈의 부모님과 만난 자리에서 크리스는 부모님과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요즘은 흑인이 유행이다", "정말 흑인이랑 하면 다르냐"고 묻는가 하면 몸을 만지면서 "굉장히 탄탄하다"라는 말을 듣는다. 별 악의 없는 말들이지만, 분명 '흑인'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에 기반한 칭찬이며 결국 차별 발언이다.
로즈의 아버지 딘(브래들리 휘트포드 분)은 한 술 더 떠서 "나는 계속 오바마 대통령을 뽑았다"면서 자신이 인종차별에 민감한 사람임을 어필했다. 그러나 오바마를 뽑았다는 것이 곧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영화 초중반에 나오는 호의에 기반한 많은 문제적 발언들이 노골적이고 공격적이진 않지만, 흑인 당사자를 '평가'하고 가치를 매기는 듯한 말들이 유쾌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정의롭고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의 세계
김지혜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교수의 저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 차별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것도 별 악의 없이? <겟 아웃>의 딘처럼 우리는 본인이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얼마든지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저자는 자신의 차별적인 관념이 언제 어떻게 표출될지 몰라, 소수자를 타깃으로 한 각종 혐오표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소수자가 차별받는지 분석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혐오표현의 방식이 매우 은밀하고, 말하는 사람도 눈치 채지 못하는 표현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주민에게 "한국인 다 되었네요"라고 하거나,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하는 말 등이 그렇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성찰할 기회를 놓치면 자기도 모르게 차별주의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알게 모르게 누리는 특권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많은 경우 그 특권을 알아챌 기회가 많지 않다.
책에서 나오는 한 예시로, 미국 웨슬리대학의 페기 매킨토시 교수가 페미니즘 세미나에 참여한 남성 동료 교수들의 행동을 통해 알게 된 부분이다. 그들은 여성 이슈에 관심이 많지만, 정작 여성에 대한 내용을 교과 과정에 포함시키자는 제안은 거절했다.
교수라는 위치에서 어떤 것을 중요하게 가르칠 것인가를 택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특권이다. 특권에 대한 무감각은 사회를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자신의 위치를 잊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머리에 뿔 달린 악마라거나, 불평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차별을 조장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대원칙에 동의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헌법에도 명시된 규범인 평등과 차별금지원칙에 적어도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진 집단은 차별을 덜 인식할 뿐만 아니라 평등을 실현하는 조치에 반대할 이유와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차별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국가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쳐왔지만 주류로서 자신이 가진 특권을 인식하지 못하여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진보' 정치인을 종종 보는 것처럼 말이다.
진보적 성향의 인사가 차별 발언을 하거나 성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이를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해당 인사가 얼마나 진보적인지, 독재 정권에 맞서서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등등을 이야기한다.
요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그 사람이 차별주의자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고 여기에 적응을 못하는 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건 진보 정치인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선량해 보이는 의도를 의심하라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론적인 부분만큼이나 근래 몇 년 동안 한국사회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문제적 사건들을 예시로 들면서 논거를 생생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저자는 나 역시 지켜보면서 경악했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장애비하 사건도 언급한다. 2018년 12월 전국장애인위원회 발대식 행사장에서 이 대표가 축사 도중 "정치권에서 말하는 걸 보면 '저게 정상인인가' 싶을 정도로 보이는 그런 정신장애인들이 많다"라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된 것.
고든 호드슨(Gordon Hodson)과 동료들이 연구에서 밝히듯, "농담은 농담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생각 자체가 사회적으로 약한 집단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유머, 장난,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웃음을 유도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놀려도 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반복된다.
이런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차별을 할 의도가 아니라는 말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아예 '공정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누구나 노력과 능력으로써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다' 즉, 능력주의(meritocracy)가 바로 그렇다. 능력에 따른 불평등과 차별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편견 없이 타인의 능력과 성과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다.
능력주의 체계는 편향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 경험, 사회경제적 배경 등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든 편향된 관점을 가지기 마련이다. 어떤 능력을 중요하게 볼 것인지, 그 능력을 어떤 방향으로 측정할 것인지와 같은 판단은 이미 편향이 작용된 결정이다.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만 하면 공정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차별이 된다. 법무사 시험에서 문제지•답안지와 시험시간을 모두에게 똑같이 주면, 시각장애인에게 불리하다. 제과제방 실기시험에서 모든 참가자에게 똑같이 수화통역사를 제공하지 않으면, 청각장애인에게 불리하다. (중략)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도리어 누군가를 불리하게 만드는 간접차별(indirect discrimination)의 예들이다.
처음에 <겟 아웃>을 통해 간접차별과 선량한 차별에 대해 이야기했듯, 현재 미국사회 역시 백인이라면 겪지 않았을 법한 일들이 계속 발생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사례는 이렇다. 흑인이 뉴욕의 맥도날드 매장에서는 1~2달러짜리 커피를 시켜놓고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있는 한인 노인들을 경찰에 신고했고, 필라델피아의 스타벅스 매장에서는 음료를 주문하지 않고 매장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흑인 청년들에게 나갈 것을 요구했다가 나가지 않자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여행 관련 커뮤니티에서 외국(특히 서양)에서 겪었던 인종차별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중국어(혹은 일본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묻는 게 가장 대표적이다. 또는 식당이나 상점 등에서 비백인이라서 받는 불합리한 처우들도 종종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거의 항상 빼놓지 않고 '그거는 차별이 아니라 그냥 친근함의 표시일 뿐이다', '좋게 얘기했는데 왜 그렇게 반응했느냐'는 댓글이 달리곤 한다.
물론 이들이 모두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일 리는 없겠지만, 서양에 거주하는 백인이라는 정체성은 분명 기득권이고, 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차별에 가담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이렇듯 인종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는 다양한 정체성이 있고, 그래서 다양한 차별의 양상 역시 존재한다.
우리가 미처 차별과 배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을 이제는 점차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외국에서는 차별의 피해자였지만, 국내에서는 언제든 우리도 차별의 가해자가 될 수 있으니까. <선령한 차별주의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