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은 1963년까지 '국립도서관'이라 불렸다. 1945년 10월 15일 문을 연 '국립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시설, 장서, 사람을 그대로 승계한 도서관이다(관련 기사 :
명동 롯데백화점 주차장에서 이 표석을 본 적 있나요).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거의 모든 것을 승계한 도서관이 '간판'만 바꿔단다고 '국립도서관'으로 전환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전환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관료와 경찰이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공무원과 경찰로 그대로 이어진 것과 무엇이 다를까.
도서관이 맞은 '해방'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은 인터뷰를 통해 그가 맞은 '해방'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조선말 썼다고 모질게 때렸던 교사가 해방 후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박완서 역시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그녀가 겪은 '해방'의 풍경을 이렇게 남겼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인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안 보이는 건 당연했지만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그냥 우리말의 국어 선생님으로 눌러앉아 있는 건 잘 이해가 안 됐다."
두 달 전까지 '사상의 관측소' 역할을 하며 '총독부도서관'으로 군림하던 곳이 간판만 바꿔 단다고 '국립도서관'이 되는 걸까. 경찰과 관료뿐 아니라 국립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모습이 우리가 겪은 '해방'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정부 수립 전에 출범한 '국립'도서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것이 1945년 9월 8일, 서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시작한 것이 9월 11일, 미군 장교가 학무국장으로 임명된 것이 9월 14일, 공립초등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이 9월 24일, 한글 교과서 발행 원고가 승인된 것이 10월 15일이다.
국립도서관은 해방된 지 정확히 두 달만인 1945년 10월 15일 문을 열었다. 국립박물관 개관일이 1945년 12월 4일, 과학관 개관일이 1946년 2월 8일인 것을 감안하면, 국립도서관이 얼마나 빨리 문을 열었는지 알 수 있다.
국립도서관이 개관한 1945년 10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다. 정부가 수립도 되기 전에 국가가 세운 '국립'도서관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 국립서울대학교 역시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나라는 이어졌으되 주권을 강탈당해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국립도서관과 국립서울대학교 모두 실질적인 설립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미군정'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제 통치기구와 제도, 인력을 그대로 유지한 미군정의 '현상 유지' 정책이 아니었다면 국립도서관과 국립서울대학교는 다른 방향으로 설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립도서관 설립 주체였던 이재욱과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 고위직에 있던 이들이어서,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도서관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일었다면 국립도서관 건립 양상도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박봉석
국립도서관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박봉석이다. 박봉석은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905년 8월 22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봉석은 1927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31년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했다.
1931년 3월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신분은 고원(雇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들어간 때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주로 분류와 편목 업무를 담당했다. 1939년 3월에는 일본 문부성 공립도서관 사서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인 중 일본 문부성이 발급한 '사서 자격증'을 보유한 사람은 박봉석과 최장수 두 사람뿐이다.
1940년 개성에 중경문고(中京文庫) 도서관 개관 준비를 맡으면서 새로운 분류표를 완성했고, 이를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로 발표했다. 1940년 시점에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10위였던 박봉석은 1942년에는 80여 명의 직원 중 서열 3위로 뛰어올랐다.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 관장과 이재욱 부관장에 이어 '넘버 쓰리'였던 셈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박봉석을 비롯한 조선인 직원은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접수할 것을 결의하고 도서관 장서와 시설 보존에 힘썼다. 1945년 9월 1일 박봉석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방문했고, 건준으로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과 철도도서관의 유지를 요청받았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접수와 건국준비위원회 접촉, 낙향한 이재욱 관장 추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박봉석은 '정무적' 감각도 상당한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1945년 10월 1일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으로부터 도서관 운영권을 넘겨받았고, 10월 15일 아침 9시 이재욱을 관장으로 박봉석을 부관장으로 국립도서관을 개관했다. '국립도서관'이라는 이름은 박봉석과 미군정 문교부 최승만 교화과장이 정했다.
해방 직후에는 무슨 책이건 우리 글로 된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강준만은 해방 이후 '유흥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호황을 누린 분야가 '출판계'였다며 당시 상황을 '출판의 둑이 터졌다'라고 표현했다. 박봉석은 '문헌수집대'를 만들어 거리에서 뿌려지고 판매되는 인쇄물을 수집했다. 훗날 건국사의 귀중 자료가 될 것을 생각한 조치인데, 이렇게 모인 자료를 해방 1주년 전시회를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1945년 12월 10일부터 1946년 5월 11일까지는 법률도서를 법제도서관으로 이관하려는 미군정의 조치로부터 도서관 장서를 지켰다. 1946년 4월 1일에는 '조선도서관학교'를 설립해서 사서 양성에 힘썼다. 조선도서관학교는 조선인 스스로 도서관 인력 양성을 위해 설립한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박봉석은 1945년 조선도서관협회와 1947년 조선서지학회 결성을 주도하고 조선십진분류표와 조선동서편목규칙을 발표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박봉석 띄우기 '제대로' 하자
박봉석을 띄우고 싶어서였을까. 박봉석을 다룬 책마다 박봉석이 만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가 "당시 여건으로는 신분상 위험이 따르는 일"이며 "냉혹한 일본의 침략정책 밑에서 박봉석의 굳은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흔쾌한 일"이라는 서술이 넘쳐난다. 박봉석이 일본 다음에 '조선문'을 배치한 이 분류표가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지점일까?
박봉석은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를 1940년과 1941년에 걸쳐 <문헌보국>(文獻報國)을 통해 공개 발표했다. <문헌보국>이 어떤 매체인가. 바로 서슬 퍼런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기관지'다. 총독부뿐 아니라 특고경찰이 감시의 눈빛을 번득이는 상황에서 민족의식이 엿보이는 분류표를 공개적인 지면을 통해 발표하는 게 가능했을까?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박봉석이 신분상 위험이 따르는 분류표를 만들어 조선총독부도서관 기관지에 발표까지 했다?
박봉석은 <문헌보국>에 발표한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신동아 건설의 가을, 우리 조선 도서관계도 그 박차를 가해야 하나 발랄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박봉석이 '조선 도서관계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언급한 '신동아 건설'은 일제가 부르짖은 '대동아공영권'을 지칭했을 것이다.
박봉석이 만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는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대목이 아니라 사서로서 그가 지닌 열정과 성실함을 보여주는 지점이 아닐까. 박봉석에 대한 '조명'은 좋지만 '오버'하진 말자.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한국의 멜빌 듀이', '도서관 사상가'... 박봉석에 대한 헌사와 찬사는 넘치지만 정작 그의 '사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전집'은 출간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박봉석을 띄우는 것은 좋다. 이왕 띄우려면 그의 사상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전집'이라도 내자.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인 박봉석이 이럴진대,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하랴.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의 저술을 모은 <이재욱 전집>도 도서관이나 문헌정보학계가 아닌 '영남민요연구회'에서 출간했다.
이재욱은 왜 철저히 잊혔을까
국립중앙도서관 '서고 견학'을 다녀온 적이 있다. 견학 과정에서 관람객의 질문이 나왔다.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 전시 공간에서 '초대 관장이 아닌 부관장인 박봉석을 기리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그때 견학을 돕던 담당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박봉석은 사서이고 관장은 사서가 아니라서 그렇다'라고. 사서여서 기리고 사서가 아니어서 기리지 않는다는 설명도 이상하지만 담당자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박봉석뿐 아니라 초대 관장인 이재욱 또한 '사서'다.
이재욱은 국립도서관 역사상 유일한 '사서 출신 관장'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도서관을 접한 이재욱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촉탁으로 들어가 '사서'를 거쳐,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2위인 '부관장'이 되었다.
1905년 박봉석과 같은 해에 태어난 이재욱은 조선총독부도서관에도 1931년 같은 해에 들어갔다. 동갑내기에 입사동기인 셈인데, 이재욱의 승진이 더 빨랐다. '제국대학' 출신인 데다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조부 이병학의 '후광'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식민지 도서관에서 보기 드문 '출세'를 한 걸 보면 이재욱이나 박봉석 모두 '능력'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이 와병 중일 때는 부관장인 이재욱이 총독부도서관을 이끌기도 했다. 이재욱은 1945년 초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그만두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경북도청에서 일하다가 해방 이후 박봉석을 비롯한 국립도서관 직원의 추대를 받아 초대 국립도서관 관장이 되었다.
1935년 <농촌도서관의 경영법>을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통해 출간하고, 해방 후 1947년에는 <독서와 문화>를 조선계명문화사를 통해 출간했다. 이재욱이 남긴 글을 살펴보면 국문학과 민속학, 서지학, 도서관학 분야에서 상당한 식견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재욱은 조선어문학회와 진단학회, 조선서지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6년 박봉석에 이어 조선도서관협회 2대 회장을 맡았다. 박봉석 부관장과 함께 '조선도서관학교'를 만들어 강사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그는 도서관 분야 '강습회'에서 빠지지 않는 강사였다. 특히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도서관연맹 주최로 열린 도서관 강습회에서 이재욱은 강사로 나선 '유일한' 조선인 사서였다.
그가 가진 실력이나 존재감으로 볼 때 이재욱은 박봉석에 필적하면 필적했지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박봉석이 도서관학을 중심으로 전문성을 키운 사람이라면 이재욱은 도서관학뿐 아니라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팔방미인 같은 재능을 뽐낸 사람이다. 도서관 분야 안에서는 박봉석이, 도서관 분야 밖에서는 이재욱에 대한 평가가 높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찌 된 일인지 이재욱은 잊혔다.
박봉석 역시 오랫동안 잊혔지만 그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이재욱은 지금도 잊힌 존재다. 이재욱이 철저히 잊힌 이유는 뭘까? 그가 '친일파'라서? 그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가 '납북'되었기 때문에?
이재욱이 일제 강점기 도서관 분야에서 조선인 중 최고위직에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3위였는데, 서열 2위인 이재욱은 '친일파'이고 서열 3위인 박봉석부터는 '친일파'가 아닌 걸까?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재욱이 '친일파'라면 박봉석도 '친일파'의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이재욱의 실력이나 경력이 박봉석에 못지않거나 그 이상임은 앞에서 설명했다. 이재욱과 박봉석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행방불명'되었는데, 둘 다 '납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납북 여부도 이재욱이 잊힌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재욱이 철저히 잊힌 것은 의아하기까지 한데, 그가 행방불명된 후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도 이유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도서관인을 발굴하고 도서관 역사를 조명하는 데 우리 도서관이 무심하고 게으른 것이 가장 큰 이유 아닐까. 늦었지만 2005년 10월 19일 한국도서관협회는 창립 60주년을 맞아 이재욱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해방 직후 박봉석이 일제로부터 장서와 시설을 지키고 국립도서관으로 전환한 것은 공적으로 치하해 마땅하다. 하지만 박봉석이 '사상 관측소' 역할을 한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서열 3위까지 오른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조선총독부도서관 부관장이었던 이재욱 역시 마찬가지다. 도서관에 대한 열정과 업무 능력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지만 이들이 몸담은 조직이 일제 통치 기구의 하나였음을 고려할 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재욱은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1937년부터 이름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촉탁'이라고 나오는데 조선인 중에 가장 수당을 많이 받았다. 1939년에는 '촉탁'이 아닌 '사서'로 기록이 나오는데, 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 중 가장 먼저 '사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도서관에 들어간 지 8년 째인 1939년부터 이재욱은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에 이어 두 번째로 관등이 높았다.
1940년에는 이재욱과 함께 박봉석이 '사서'로 기록된다. 1941년 직원록부터는 조선인 이름이 사라지고 일본식 이름만 나타나는데, 사서 '아오키 슈조'(靑山修三)가 이재욱이고, 사서 '와야마 히로시게'(和山博重)가 박봉석이다. 개정조선민사령에 의해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이 시행되는데, 이재욱과 박봉석 모두 1941년 직원록 작성 이전에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소속 기관에서 일하면서 창씨개명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고 창씨개명 여부가 친일 부역의 잣대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사상 통제'를 주도한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고위직에 있던 조선인이라는 점은 당혹감을 안긴다.
일제 강점기 공직자의 관등은 친임관(親任官), 칙임관(勅任官), 주임관(奏任官), 판임관(判任官) 4종류였다. '친임관'은 천황이 직접 임명한다는 의미로 조선에서는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두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칙임관'은 총독부 국장과 각도 도지사 같은 고관이다. 고등관 1등급과 2등급이 칙임관에 해당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중앙부처 차관과 국장급이다. 칙임관 이상은 '각하'라고 불렸다.
'주임관'은 고등관 3등급부터 9등급까지다.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거나 판임관에서 승진해야 주임관이 될 수 있었다. 주임관 중 참사와 부참사는 1945년 서기관과 사무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군수도 주임관이었는데, 주임관 이상을 '고등관'이라고 했다. '판임관'은 고위직이 아닌 일반 직원으로 지금의 6급 이하 공무원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도서관 부관장 이재욱과 서열 3위 박봉석의 '관등'은 어느 정도였을까?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는 1942년부터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만 표기하고 직원의 관등은 1941년까지만 기록이 남아 있다. 1941년 이재욱은 사서 관직 4등급, 박봉석은 6등급이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직제>를 살펴보면 관장은 주임관, 사서는 판임관이다. 이재욱과 박봉석은 판임관인 사서였는데 관등은 이재욱이 더 높았다. 해방 즈음에는 이재욱과 박봉석 모두 사서 2등급과 4등급까지 각각 승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은 '주임관 이상'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해방 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3월 13일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범에 대한 특별법률조례'(이하 특별조례)를 상정하고 7월 2일 최종안을 확정했다. 특별조례에 따른 부일협력자는 10~20만 명, 민족반역자는 약 1천 명, 전범은 2~3백 명, 간상배는 1~3만 명으로, 총 20만 명 정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추산됐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특별조례는 미군정 장관이 인준을 거부하면서 시행되지 못했다. 이후 제헌국회에서 만든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에서는 '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친일파'로 규정했다.
남조선로동당의 규정,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특별조례, 반민법 어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로 '단죄'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당시 친일파 청산 기준이 '최대치'가 아닌 '최소치'에 가까웠다는 점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재욱과 박봉석이 '사상의 관측소' 역할을 하던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고위직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프랑스처럼 '엄격한' 과거 청산을 했다면 이재욱과 박봉석은 '부일협력자'에 포함되었을 수 있다.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는 과학자와 건축가, 사서 같은 '테크노크라트'의 친일과 부역에 대해 관대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데 이 부분 역시 짚고 넘어 가야 하지 않을까.
해방 후 최린은 반민법정에서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라는 말을 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활약하다가 변절한 최린은 그렇게 자신의 친일과 부역을 사죄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그대로 '승계'해서 문을 연 국립도서관은 '사상 통제 기관'으로 기능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떤 '반성'을 했을까. 국립도서관의 개관일을 1945년 10월 15일로 정하면 그것으로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의 과거는 '청산'되거나 '단절'되는 것인가. 국립도서관뿐 아니라 '제국의 사서'이자 일제 강점기 지도적 위치에 있던 도서관인들이 식민 통치 기구에서 일한 과거에 대해 아무런 입장 표명이 없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도서관의 식민 잔재 어떻게 '청산'할까
해방 직후에 이뤘어야 하지만 우리는 해방 후 지금까지 제대로 식민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과제는 계속 우리 발목을 붙잡아 해방 75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우리는 '청산'을 이야기한다.
식민 시대의 청산은 인적, 물적 청산을 바탕으로 제도와 문화적 청산까지 방향을 잡아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인적, 물적 청산이 불가능해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청산을 해야 할까. 과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통해 '교훈'을 되새기고, 식민의 잔재 중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를 설정해서 그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청산 과제가 아닐까.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나자 촉탁이나 하급 고원으로 일하던 조선인이 도서관 운영을 맡았다. 도서관 상층을 구성하던 일본인의 공백을 하층에서 일하던 조선인이 메웠다. 일종의 신분 상승이 이뤄진 셈이지만 갑자기 도서관을 맡게 된 조선인들은 어떻게 도서관을 운영했을까?
급한 대로 조선어로 된 장서를 수집하고, 조선에 맞는 분류 체계를 도입하고, 도서관학에 대한 지식도 습득하는 등 해방 조국의 실정에 맞는 도서관을 위해 분주했을 것이다. 넘치는 의욕에도 그들이 아는 도서관 지식은 일제가 이식한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그들이 도서관 업무를 배우고 익힌 일제 식민 시대의 경험과 유산이 우리 시대 도서관에 얼마나 이어지고 어떻게 제도화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가 청산할 잔재와 적폐인지 구분조차 쉽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작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 후손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트라우마처럼 안고 살 것이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국립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